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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유적의 성격에 대한 시론-성곽유구를 중심으로-(益山 王宮里遺蹟의 性格에 대한 試論-城郭遺構를 中心으로-)

  • 분류 고고·미술 > 건축
  • 권호수 제58.59합집호
  • 저자 지병목
  • 발행일 1999년
  • 게재지 사학연구
  • 발행처 한국사학회

목차

머리말
Ⅰ. 왕궁리유적의 지정학적 위치와 조사경과
Ⅱ. 왕궁리유적 성곽유구의 발굴 성과
Ⅲ. 성곽유구의 특징과 그 주체세력에 대하여
1. 성곽유구의 특징
2. 성곽의 주체세력에 대하여
맺음말

요약

왕궁리유적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특징을 살펴보고, 이러한 특징에 부합될 수 있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구명작업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왕궁리유적은 삼국말기 백제 중앙정부의 익산경영 의지에 의해 상당한 관심과 노력이 기울여졌을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현 5층 석탑 하부에서 발견되는 유구들은 이 유적이 이르게는 백제말기에 어떠한 목적에 의하여 경영되었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이들 유적이 지닌 지정학적 조건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천도를 기정사실로 인정한 상태에서의 백제 중심지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비한 점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할 때, 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성곽유구의 사용자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 『삼국사기』나 중국문헌에 등장하는 安勝으로 대표되덕 보덕국의 존재였다. 이 보덕국은 그 존재목적이 신라의 대당․대백제 복속민에 대한 고도의 정치적 술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백제가 멸망한 그 자리에서 명목상으로나마 백제를 대신하는 최고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군사․외교적 기능을 제외한 그들의 경제적, 위신적 입지는 前代의 백제 최고위층 집단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시 백제지역의 최고 지배집단이 누리던 외형적 격식이 거의 그대로 이들에게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에서 나타나는 유물들이 이 지역에서도 자연스럽게 확인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중 일부는 전대부터 있었던 백제의 익산경영의 소산물에서 비롯되었을 것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투항한 옛 고구려유민을 효과적으로 慰撫하고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고백제지역에서 생겨날 수 있는 저항을 이이제이적 방법으로 제어한다는 뚜렷한 의도가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이 집단의 세력화를 저어한 신라정부의 치밀한 사전 견제책으로 인하여 이들의 근거지는 외형적인 조건은 어느 정도 갖추어졌지만 실질적인 도성적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미약한 이 왕궁리유적의 성곽이 선택되어졌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나마 이들 존재에 대한 정치적 필요성이 상실된 후에는 그 사용주체뿐 아니라, 외형적으로 존재하던 성곽의 존재도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시켜졌음을 발굴조사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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