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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고고학(百濟 考古學)

  • 분류 고고·미술 > 기타
  • 권호수 제33집
  • 저자 윤덕향
  • 발행일 1992년 7월
  • 게재지 국사관논총
  • 발행처 국사편찬위원회

목차

Ⅰ. 머 리 말
Ⅱ. 제1기:植民地下의 考古學
Ⅲ. 제2기:小集團의 考古學
Ⅳ. 제3기:武寧王陵그리고 古墳考古學
Ⅴ. 제4기:計劃發掘그리고 基層文化에의 關心
Ⅵ. 맺 는 말

요약

제1기인 식민지하에서는 考古學的活動에 의하여 적지 않은 遺蹟과 遺物이 調查되고 그 性格, 年代 등이 밝혀졌다는 점을 肯定的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이들에 의한 調查는 征眼集團으로서 被征服集團에 대한 文化的收奪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否定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 자체 내의 考古學硏究水準은 西歐의 考古學水準에 비하여 劣惡한 것이었으며 植民地朝鮮에서 그들의 考古學硏究方法은 遺物掠奪式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이 기간 중 이루어진 많은 發掘調查가 古墳을 주된 대상으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서 분명한 것이다.
제2기는 식민지 지배하에서 植民史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학문적 자유가 被支配民族인 韓民族에게 賦與되는 기회가 적었다. 이에 따라 百濟考古學의 硏究는 본격적인 活動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몇몇 硏究者들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保存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소규모이고 체계적인 조사는 아니라 할지라도 百濟文化의 硏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遺蹟·遺物에 대한 발견, 조사를 기반으로 以後考古學硏究가 이루어졌다. 열악한 硏究與件에서도 개별 연구자들의 진지한 硏究姿勢와 끊임없는 探究作業이 이루어졌으며 연구인력을 꾸준히 증대하였다.
제3기는 1971년 武寧王陵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이 發掘을 계기로 百濟文化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점증되고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遺物을 展示, 保管하기 위한 시설로 國立公州博物館이 설치됨으로써 百濟考古學의 硏究機關이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경제발전과 더불어 그로 인하여 파괴되는 遺蹟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됨으로써 소위 救濟考古學으로서의 각종 發掘調查가 활성화되었다.
제4기는 1970년대에 經濟發展과 더불어 觀光立國의 기치아래 진행된 慶州 우선의 각종 文化財發掘調查는 政治的요구에 의하여서도 百濟文化에 대한 개발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부터 百濟文化를 調查·硏究하기 위한 計劃, 즉 中西部古都文化圈開發計劃이 수립되어 추진되게 되었다. 이 계획의 수립과 추진은 中央政府{의 政策的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발굴조사의 규모가 커지고 장기간의 조사를 요하는 것으로 以前까지의 發掘調查와는 양상을 달리 하는 것이다. 따라서 中西部古都文化圈開發計劃이 시작된 1980년을 基點으로 하나의 分期를 구분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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