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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과정의 제문제(百濟 建國過程의 諸問題)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창간호
  • 저자 김문수
  • 발행일 1996년 12월 20일
  • 게재지 경기향토사학
  • 발행처 전국문화원연합회경기도지회

목차

머리말
Ⅰ. 馬韓·蓋馬國·蓋馬韓·蓋國의 考察
Ⅱ. 朝鮮百濟의 考察
Ⅲ. 扶餘百濟의 考察
Ⅳ. 慰禮城의 考察
맺는말

요약

백제의 건국과정을 밝히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백제사 자체의 사료 검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건국과정을 파악하는 방법은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의 건국설화에서 합리적 해석을 도출하려는데에서 모순이 있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가 중국사서와 기존의 百濟·高句麗紀를 조합하여서 찬자들의 사관에 의한 저술인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백제 건국세력의 유입과정은 재검토하여야 하는 당위가 설정된다. 먼저 백제의 영역에 先住集團으로 있었던 마한의 실체를 검증하므로써 고조선 유민의 南來가 백제건국에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지를 검토하였다. 목지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마한은 압록강유역의 蓋馬韓과 같은 개념의 濊族으로서 고조선에 함축되어 있는 蓋國에 근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목지국의 마한의 명칭은 기자조선의 末王 準이 고조선 중심세력인 蓋馬韓의 族名을 목지국에 添稱하므로써 시작된 것이다. 『주서』『북사』에 나타나는 「蓋馬韓之屬國(也)」의 馬韓은 목지국의 마한이 아니라 압록강유역의 蓋馬韓을 가리키고 있음을 전제로 하였다. 그러므로 蓋馬韓·蓋馬國·馬韓(또는 목지국의 馬韓)은 같은 개념의 濊族인 기자조선의 유민으로서 漢에 귀속을 거부한 주체적 집단으로 파악되었다.
한강유역에 첫 번째 유입된 伯濟는 위만조선의 멸망 후에 발생한 고조선유민들로서 朝鮮百濟라고 命名하였다. 漢의 고조선 정벌은 齊의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마무리되었다. 『史記』「侯者年表」에서 朝鮮王 右渠를 배반하고 漢에 복속한 朝鮮의 대신들에게 領地를 하사한 지역이 齊의 중심지였던 산동성(반도)일대로써 秦에 멸망한 齊國의 지역이다. 漢은 고조선유민들을 燕을 넘어서 齊에 유입시키므로써 고토의 고조선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전쟁으로 피폐된 齊를 복구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齊에 귀속된 고조선유민들의 명칭은 중국 전통의 국명인 단음절 「齊」를 허용하지 않고 卑稱인 貊齊라고 불렸을 것이다. 이러한 貊齊 중에서 異名同人으로 밝혀진 尼 谿(歷谿) 參 집단이 산동반도에서 「東之辰國」하여 한강유역에 유입하므로써 先 貊齊의 개념과 바다를 건너온 사실을 덧붙여서 伯濟가 되었고, 晋時代 扶餘百濟에서는 중국군현(낙랑·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용병국으로서의 충정이 더 한층 미화되어 「貊(伯)」의 개념을 버리고 百濟의 국명을 얻은 것이다. 朝鮮百濟의 王系를 파악하지 못한 『삼국사기』찬자들은 고구려 건국설화를 모방하여 朝鮮百濟의 시조를 溫 (古)朝鮮의 개념인 溫祚(朝)로 의인화하였고, 溫祚 다음의 王系는 扶餘百濟에서 冒稱하였다. 朝鮮百濟의 건국 紀年은 『삼국사기』찬자들이 고구려와의 형제설화로 묶기 위항 고구려 유리왕 즉위(BC19) 다음 해인 BC 18년으로 정하였으나 사실은 고조선이 멸망하던 BC108년으로 90년이나 앞서 있었다. 漢水地域(漢江·南北漢江·臨津江·漢灘江)에서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의 一國으로서 한수지역 이외에 산재한 70여 국의 漢族과 대등하게 濊族을 표방한 朝鮮百濟의 몰락 시기는 公孫康이 대방군을 설치하고 韓·濊를 정벌한 이후 韓으로 단일화되어 濊가 보이지 않으므로써 후한 건안 연간(AD 196~220)으로 추정된다.
朝鮮百濟의 몰락 이후에 한강유역에 유입된 扶餘의 유민들은 扶餘百濟라고 한다. 扶餘百濟를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扶餘를 이해하여야 한다. 『주서』『북사』『수서』에서 백제의 시조로 나타나는 구태는 부여에서 신격화된 조상이며 위구태는 各 部族長인 諸加들에 의하여 옹립된 제사장으로서의 왕의 명칭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부여는 왕계가 세습화되었고 중국군현과 북중국 諸部族 그리고 고구려 사이에서 친중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자주성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부여를 攻破한 것이 요하상류 朝陽에서 일어난 선비족 慕容廆의 침입이었다. 이때 부여는 동옥저까지 쫓겨갔었고 晋의 武帝는 교체된 동이교위하감에게 扶餘復國을 지시하였다. 하감에 의하여 복국된 부여를 『자치통감』에서 4세기 중반에 나타난 燕의 모용황에게 攻破되어 복속된 부여와 동일시하므로써 부여 복국이 부여의 고토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자치통감』에서 나타나는 부여는 부족장이 玄으로서 부여왕계와 전연 무관할 뿐 아니라 정황적 상황으로 보더라도 부여고토의 잔류민으로 확인되었다. 하감이 선택한 부여의 복국지는 모용외와 고구려의 세력이 미치지 않고 2군(낙랑, 대방)을 한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한강유역의 완충지대였다. 부여의 後王 依羅는 동옥저에서 買沈(하감의 부하)에게 인도되어 모용외와 고구려 사이를 빠져 나와 대방군에 안착하였다. 晋은 漢時代와 마찬가지로 부여집단을 한강유역에서 복기시키므로써 朝鮮百濟의 잔류민과 더불어 濊族의 發興을 꾀하였다. 이러한 晋의 정책은 漢의 한반도 경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써 濊族과 韓族을 대립시켜 한강유역에서 강력한 고대국가의 출현을 제어하고 二郡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대방에 안착한 부여는 晋의 정략에 따라 帶方女 寶菓와 扶餘王 依羅의 결혼으로 혼인동맹을 맺고 부여복국을 선언하였다. 또한 韓族과 차별을 두어 중국 국명에서 유래된 朝鮮百濟의 국호를 계승하므로써 朝鮮百濟의 유민들을 수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濊族의 백제를 선언한 扶餘百濟는 대방군에서 패수와 대수를 건너와서 朝鮮百濟의 위례성을 수리하여 도읍으로 정하였으며 왕명 역시 부여식표기를 버리고 漢文化한 責稽로 바꿨다. 扶餘百濟가 개시한 기년은 晋의 武帝가 扶餘復國을 지시한 다음 해인 責稽王 元年으로써 AD 288년이다. 扶餘百濟의 초기에는 責稽系와 比流系의 왕계교체가 있었으나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 때에 들어서면서 건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여 末王 의자에까지 비류계로 일관되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위례성은 사료가 인정되는 책계왕 원년에 위례성을 수리하여 도읍으로 정한 사실로 미루어 朝鮮百濟에서도 도읍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강유역 韓地에서 예족인 朝鮮百濟 尼谿 參 집단이 이주하여 처음으로 예족의 근거지를 확보하였으므로 한족에 의하여 명명되었거나 한족에 대한 예족의 우월성에 대한 自名이든 간에 濊城일 가능성은 높다. 예족인 부여인은 고토에서 그들의 구심점을 濊城으로 불렀다. 고토를 상기하는 예족인 朝鮮·扶餘百濟人들에게 濊城과 같다는 의미로 慰濊城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소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慰濊城이 慰禮城으로 표기되는 것은 「禮」rk 두음에서 ‘예’로, 차음에서 ‘례’로 변화하여 모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음을 첨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朝鮮百濟의 왕력이 신빙성이 없음이 파악되었다. 朝鮮百濟에 있어서 다른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기년을 정리한 역사서가 편찬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溫祚條의 기사는 위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溫祚條에서 말갈과 낙랑의 침입을 극대화하여 건국의 어려움이 외침에 있었던 것으로 작위하는 과정에서 하북위례성을 가정한 것이지 위례성은 책계왕 원년에 파악한 대로 한강 南에 하나 밖에 없었다. 책계왕 원년조에서 朝鮮百濟가 사용하였던 위례성을 수리하여 궁성으로 삼고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강 북안의 아차성과 남안의 사성을 방어선으로 정비하였다면, 위례성은 한강 南에 있었으며 자연지리적 배경으로 압축된 한강의 방위개념 속에 있어야 한다. 『후한서』『삼국지』에서 부여는 성을 둥글게 만들어서 그 안에 궁성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부여족이 성에 대한 개념은 목축과 농경을 관리하는 유목집단인 부여에 있어서 水原을 확보할 수 있는 평지성을 선호한 것으로써 한강유역에 안착한 扶餘百濟는 그들의 방식대로 평지성인 위례성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위례성이 평지성이었다는 증거는 사료가 인정되는 『삼국사기』백제 분서·비류왕 때에 궁성이 민가와 어울려져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扶餘百濟 초기 유민집단인 책계 원년에 있어서 한강의 방위개념은 최소한 압축되었을 것이며 이에 포함된 한강 南의 평지성인 위례성은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증거하는 풍납동토성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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