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은 정치적 대외관계의 한 형태로 고대국가간에 흔히 존재하면서도 시대적 배경에 따라 인질의 성격과 기능이 크게 변화하기에 당시 제세력간의 역관계를 규명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질의 기원은 고대사회의 경제제도에서 파생된 한 형태로 파악할 수 있지만 중화적 왕도사상과 연좌제 사상에서 그 원초적 형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대 인질외교의 전반적 형태는 재질의 공여를 뜻하는 賂와 함께 종교적 결속력을 갖는 盟에 수반되어 나타난다. 인질의 유형은 出質, 納質, 交質, 委質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납질은 주로 침략을 방지하고 복속의 표상으로서 때로는 궁중 수비군인 숙위의 형태나 대립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략적 방편으로서 이용될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삼국시대 인질외교는 대개 고대국가의 발전과정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여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고대국가 형성기에는 고구려와 신라 인근국가와의 대립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위해 일반적으로 인질외교를 맺게 되었다. 특히 4세기중엽에서 5세기중엽에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반영한 외교개념의 형태로 나타나며 고구려는 대백제전에서의 열세를 탈회하기 위하여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는다. 신라는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던 내물왕대 이후 김시 왕위세습에 의한 왕권확립을 위해 고구려가 필요했지만 신라 발전에 저해요인으로 나타난 대고구려 및 왜관계라는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자주화 정책을 추구하게 된 배경으로 고구려와 왜에 인질이 파견된 것이다. 그런데 실성, 미사흔 같은 인질 파견에는 신라 내부 세력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정치 성격을 띰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영락 6년 대공세로 백제 아신왕은 굴복하고 고구려에 노객을 맹세함에 고대 전반적인 인질외교 형태인 맹, 뇌, 질의 형식이 나타나 당시 화이관의 확대에 따라 연호사용, 조공 표현, 대왕제칭호 등과 같은 고구려 천하관을 반영하는 외교 개념이 있었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 신라의 동맹체제에 대항해서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파견하여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이때 전지는 왕위즉위초에 보이는 정변을 볼 때 정치적 추방으로 보이며 청병사 내지 수신사 기능을 가진 인질이다. 7세기중엽에는 신라는 대야성 전투 이후 당의 왕도사상의 표현이 숙위제를 통해 고구려, 백제 정복을 위한 청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삼국통일과 함께 인질외교도 나당간에 숙위외교의 형태로 집적되어 인질제도로서 기능이 크게 변화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