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연극은 서역악이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안악고분과 통구 및 평양 일대에 아직 산재한 고구려 고분벽화 등이 이를 말해준다.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상 자연 수, 당과의 문화예술이 교역되었지만 중국은 벌써 한나라 서역과의 교통이 열리고 왕래가 잦아 고구려 역시 서역과의 전교 영향이 미쳤고 그 대종을 이룬 것은 불교와 그에 따른 제반 예술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가악은 순수 고구려의 가희와 창악으로 중국정사의 가희나 다른 문헌의 창악 등은 농경 및 제천행사의 일종인 동맹을 가리킨다.
백제는 일찍이 중국남조의 여러나라와 교섭을 맺고 이로부터 수입한 불교와 그에따른 제반예술, 포교놀이인 기악은 후일 일본에 전해 그들 연극의 고유명사처럼 되어갔다. 백제 무왕13년,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로부터 불교 교훈극의 하나인 기악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있다. 이때 사용된 기악 가면 2백여면이 일본 국립박물관과 동대사를 비롯한 많은 절간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에 관한 기록은 그로부터 약 6백년이 지난 천복 원년(1233)에 일본 악인 백근진에 의해 저술된 교훈초에 간단히 소개 되어 있다. 백제 연극은 외래 문화와 예술을 일찍 흡수하여 정화를 이룩했으나 다만 가장 먼저 패망하여 백제 정통과 문화예술이 후세인에게 잊혀졌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떨어져있는 반면 일본과는 가까워 일본에 신라악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 신라에서는 순수 국풍의 가악을 일러 향가라 했고 무악과 극적 요소를 담은 극희는 향악이라 하였다. 통일전후 신라는 불교와 당을 통해 들어온 서방 문물과 예술이 신라의 향악과 백회 등에 영향을 미치며 은연 중 흡수되어 갔다.
신라 연희 중 다소나마 그 내용과 유래를 전하는 것은 검무, 무애가무, 처용가무, 오기 등이며 오기는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가 있다.
삼국의 연극에 관해서는 현존 문헌자료를 통해 실제를 찾을 길이 없으며 삼국이 쇠퇴하면서 많은 승려, 학자, 악공, 기예인들이 일본으로 들어가 우리; 특유의 문화 예술은 물론 오락과 풍속, 놀이까지 전수해 갔다. 따라 일본에는 도리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많은 자료가 있다. 이의 원형의 발견과 복원에는 신중함을 따라야 하며 안이한 판단은 금물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