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사비 천도 이후, 백제의 사원과 왕궁의 와당
III. 飛鳥寺 창건와와 백제의 瓦博士
IV. 맺음말
요약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인 비조사(아스카데라)의 창건와에 대해서는 와당 문양과 제작기법, 공반되는 암키와․수키와 등의 차이에 따라 화조(하나구미)와 성조(호시구미)라는 두 계통의 기와가 제작․사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창건와가 백제의 어느 지역에서 비롯되었는지 조형을 찾는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지만 견해가 일치되지는 않는다. 본고에서는 비조사 창건와의 원류라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사비 천도 이후, 백제의 주요 사원이나 왕궁에서 출토된 창건기 와당의 전개 양상과 생산․운영체제의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았다.
먼저 부여 정림사지, 능산리사지, 군수리사지, 왕흥사지 등 부여 지역의 사원에서 출토된 창건기의 와당과 구아리․관북리․쌍북리, 부소산성, 익산 왕궁리 등 사비시기의 왕궁 관련 유적에서 출토된 와당을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사비시기의 주요 사원들은 새로운 사원이 창건될 때 새로운 와범형이 제작되어 사용되지만, 왕궁 구역에서는 특정 문양의 와범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 비조사와 연대적으로 가까운 왕흥사지의 창건와에서는 화조․성조 계열과 가장 유사한 패턴이 확인되었지만 약간의 차이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비조사의 창건와를 제작한 백제의 와박사들은 6세기 중후반 백제의 “왕궁과 사원”의 전각에 사용하던 기와를 생산하던 “관영조와공방의 조와 집단이나 기술계 관료”였다고 평가하였다. 화조의 경우 생산지는 알 수 없지만 부여 구아리․관북리․쌍북리유적 및 부소산성․왕궁리유적 등 왕궁 관련 유적에서 출토되는 와당을 조형으로 하였고, 성조의 경우 금덕리 요지나 왕흥사지 요지에서 활동하던 조와집단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대통사식와당을 조형으로 하였다고 보았다.
비조사의 경우 백제 사원의 창건와가 새로운 와범형이 제작된 것과 동양으로, 그 창건 시에 새로운 문양의 와범이 제자․사용되었지만, 그때 채택한 문양은 백제의 왕궁에서 사용하던 최신의 문양이었다. 이것은 기념비적 건물의 건립을 통해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던 수용자측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588년 백제에서 파견된 와박사들은 왕궁이나 사원의 기와를 생산하던 공덕부와 사공부 등에 소속된 기술계 관료이자 실무책임자로 寺師 등과 함께 백제에서 조직한 프로젝트팀의 일원이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