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자료 DIGITAL ARCHIVE

검색

문헌

6세기 전반 겸익의 구법활동과 그 의의

  • 분류 문헌 > 종교·사상
  • 권호수 제33․34합집
  • 저자 심경순
  • 발행일 2001년 12월
  • 게재지 이대사원
  • 발행처 이대사학회

목차

1. 머리말
2. 구법배경과 동기
(1) 무령왕대 정치적 상황과 대외관계
(2) 구법동기
3. 구법활동
(1) 구법여정
(2) 인도에서의 구법활동
4. 귀국 후 활동과 그 영향
5. 맺음말

요약

본 논문은 삼국 최초의 求法僧인 謙益의 구법활동에 관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謙益의 출발시기를 무녕왕 12년(512)으로 새로이 추정해 보고, 이 당시 백제의 정치적 상황과 대외관계를 통해 구법배경을 찾아보았다. 당시 백제는 정치적으로 웅진천도 이후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여 안정을 되찾은 상태로, 대외적으로도 고구려와 치열한 경쟁을 하며, 한편으로는 탐라 및 가야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국가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서 불교를 진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백제불교계에서도 웅진천도 이후 허술해진 교단의 정비와 쇄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다음 謙益이 인도로 율을 구하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구법동기를 중국 남조국가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찾아보았다. 백제는 중국 남조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당시 융성했던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謙益이 떠날 때까지 중국에서는 사대광율이 번역되었고, 남조에서는 십송율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계율이 엄정하게 지켜지지 않아 불교적 폐단이 심각하였으며, 일반 서민과도 괴리되어 왕실과 귀족중심의 불교가 성행하였다. 이 때문에 謙益은 중국이 아닌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나게 된 것이다. 謙益은 해로를 이용하여 중인도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계율의 수행과 더불어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범문와 범어에 통달했고, 율부를 깊이 공부했다. 그의 귀국 후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역경작업이다. 謙益은 10여 년의 구법활동을 끝내고 성왕 4년(526)에 인도승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본을 가지고 귀국했으며, 왕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또한 謙益에게 안주할 절을 제공했고, 이곳에서 그는 범본 72권을 왕실 및 국가의 후원으로 배달다삼장과 국내 승려 28명과 함께 번역하였다. 특히 설일체유부의 논장과 율장으로 생각되는 "비담"과 "신율"은 왕이 직접 그 서문을 쓰고, 태요전에 보관할 만큼 불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매우 의의가 컸다. 한편 謙益으로부터 시작된 백제 승들의 구법활동은 단지 선진적인 불교를 배워 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일본에 전하는 전법활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와 더불어 律師의 파견은 초기 일본 계율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일본의 비구니들은 백제에 와서 계를 받고 계율을 학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백제 계율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며, 결국 謙益의 구법활동은 백제의 계율불교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필자 초록)

동일한 곳에서 발행한 자료

  • 이대사학회 에서 추가 발행한 자료가 없습니다.

'심경순'님께서 발행한 자료

  • 심경순 님께서 추가 발행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