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부여융 묘지명>을 통해서 먼저 그 현상과 비문의 내용 구성 및 부여융의 생애와 활동내용을 관계 문헌사료와 함께 살펴 보았다. 그리고 부여융이 과연 의자왕의 태자였는가에 대하여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각 사서에 태자로 언급되어 있는 부여풍, 융, 효, 강신, 숭의 다섯 명을 검토해 보았는데, 그 중 의자왕대의 태자는 효보다도 융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근거로 융을 태자로 기록한 당대 기록인 <당평제비>, <유인원 기공비>, 《이길련박덕서》의 사료가치가 높다는 점, 융이 웅진도독에 임명된 점이나 <흑치상지 묘지명>에 융을 ‘其主’로 표현한 점, 효를 태자로 기록한 《삼국사기》의 백제 멸망기 상황에 대한 서술태도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어 융이 태자일 가능성을 입증하였다.
태자 융과 다른 왕자들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관계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백제 멸망기 왕자의 서열은 태자 융, 소왕 효, 태, 연의 순이었으며, 이 서열은 혈육관계라기보다는 왕자들의 정치적 서열을 나타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왕자들을 왕권 중심으로 서열화하기 위하여 왕-태자-소왕-왕자의 순으로 왕자들을 세 단계로 서열화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따라서 왕비, 왕족을 비롯한 이들 왕자는 의자왕 15년 이후 왕권을 정점으로 하여 군신회의, 22부사와 함께 국정을 담당하ㄴ는 세 축의 하나로서 국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이 묘지명을 통해 7세기 말 당대인들의 백제 인식문제를 검토한 결과 세 측면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우선 진국-마한-백제의 계통성에 대한 개괄적인 지견을 바탕으로 하여 생성된 인식, 백제를 고구려와 동일시하려는 인식, 그리고 중화사상에 윤색된 관념적인 인식의 세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들의 백제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이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중화사상의 테두리 속에서 백제를 관념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부여융 묘지명>에 그의 태자경력을 언급하지 않은 점도 이와 같은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