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대에는 16관등제와 22부제, 방군성 체계를 가진 군사조직망의 정비 등 중앙집권화된 관제정비가 행해졌고 특히 내정기구와 근시기구로 구성된 22부를 중심으로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을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 성왕의 ‘聖’자로 상징되는 배타적 왕족의식의 고양 등으로 일단 전제왕권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왕대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불교, 유교, 음양오행설 등 보편적 사상을 조화있게 수용하였고 그밖에 남부여 국호에서 시사하듯 부여족 동실의식 강조, 오제신 및 구태묘 제의를 통한 백제왕실의 전통성 확립, 시호제 실시 등 적극 전개하여 전제왕권 확립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왕권전제화시책에서 요구되는 통치영역의 확보를 백제고토에 대한 실지회복운동으로 표출시켰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과 같은 정복군주들처럼 원영역을 크게 확대시켜 영토국가의 면모를 보였으나 성왕은 백제의 오랜 염원이던 한성고토 수복과 근초고왕대 이룩한 가야권에 대한 세력확장으로 끝나 차이가 있다. 전제왕권의 지표인 칭제건원 문제에서도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주서 백제조에 어라하와 건길지라는 백제왕에 대한 고유 호칭이 주목되는데 이는 한자식 표현인 대왕호와 관련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달리 연호는 사용하지 않고 다만 간지를 사용했다. 성왕의 전제왕권시책으로 전제왕권 확립을 보게 되었으나 신라 중고기와 일정한 차이가 보인다. 22부의 설치, 운영은 귀족세력을 압도할 만한 제도 개편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남부여 국호에서도 다원적인 귀족세력을 결집시키니 위한 이념구심체로서 전통적 부여족 동질의식은 한계가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