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군파견의 동기는 전쟁을 이용하여 국가권력의 집중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백강구전의 성격에서 볼 때, 2회의 걸친 파견을 일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1,2차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다. 1차는 단순히 풍장을 위해서였고 2차는 백제측의 요청과는 관계없이 군권을 집중하여 지배집단의 결과의 핵이 되고자 한 천지에 의한 ‘신라의 정벌’을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이 전쟁은 역사의 시간적 관련선상에서 행하여지기 했지만 이미 시간적 영역을 떠난 7세기 동아시아라는 공간적 영역의 장을 공유한 것이다. 백강구의 전투를 통해 본 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구조는 당의 한반도 삼국 및 왜에의 기미정책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정책에 대해서 신라, 왜 양국은 각각 대응을 해나가면서 신라는 한반도 통일, 왜는 율령국가로의 지향을 꾀하였다. 그 결과 신라로서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한민족의 민족사를 통일신라라고 하는 민족공동의 장을 통해 만드는 결기를 이룬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로서는 일본열도를 왜민족의 역사적 장으로서 천황, 화이사상을 배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라의 북방에 발해국가가 출현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구조는 이들 네 나라에 의해 형성,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의 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로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것이 현실적 이해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백강구전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와 당이란 이질적인 두 세력의 통합은 백제와 고구려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당의 정책이 고구려의 토벌에 있던 것을 간과한 신라가 당을 이용하려는 측면과 신라의 정책이 백제의 토벌에 있었던 것을 이용하여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한 당의 전략이 이들의 통합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양국이 적대관계가 된 것은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에 두려한 당의 정책과 고구려 전체를 통일하려고 한 신라의 정책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