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씨의 계보는 『고사기』의 효원천황 또는 그 손자인 武內宿禰(무내숙녜)의 후예로 보거나, 백제 木滿致(목만치)의 후손으로 보는 설이 있다. 본거지에 대해서도 大和(대화) 또는 河內(하내) 지역으로 비정하는 등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의 공통점은 일본 내 씨족들 가운데 소아씨가 유독 도래계(백제계) 씨족들과 밀접했다는 것이다.
소아씨는 도래계 씨족을 그 휘하에 두고 대륙문화의 수용과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屯倉(둔창) 경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경제력을 높여 중앙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한 씨족이다.
소가씨가 건립한 비조사도 고구려방식의 가람배치를 채용하고, 북위 양식의 대불을 만들었으며 백제에서 도래한 승려나 기술지도자들을 동원해 완성했다. 이렇듯 소아씨는 도래계 씨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적극적으로 외래의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대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