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興寺(왕흥사)의 조사에서 확인된 정보를 飛鳥寺(비조사)와 비교·검토하였다.
비조사는 왜국 초기의 본격적인 사원 건축이며, 백제 불상문화의 유입을 기초로 건축되었음을 왕흥사의 발굴 성과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는 문헌사료의 기록대로 비조사 창건시의 상황과도 일치되는 것이 많다. 또한, 출토 유물과 가람배치의 문제로 논의되어 왔던 비조사의 재래성·국제성에 대해서도 왕흥사의 자료가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다.
한편, 동아시아제국은 불교를 매개로 하나의 세계로 이해되어 왔다. 불교의 도입 경위가 비교적 명료한 신라와 왜국의 경우에는 불교가 국제관계에 결부되어 지배자층의 혼란을 수습하고 성행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혼란한 국제관계 속에서 왜국내에서는 숭불논쟁이라는 씨족간의 대립이 야기되었다. 결국 승자는 지배자층 공유의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하고, 국제교류의 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즉 불교는 왜국 내외의 대립을 완화시키고, 왕권 중심의 통합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