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촌강전투 패배 이후, 일본이 당·신라의 침공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북부큐슈나 瀨戶內(래호내) 지역에 세운 방위강화책에는 백제망명인들이 크게 관여했다. 그러한 상황은 수도였던 飛鳥나 近江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궁을 감싸는 나성과 같은 시설이나, 봉수, 산성 등 국지적인 방위체제의 구축에 망명백제인의 기술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백제망명인들이 지니고 있던 백제왕경(사비도성)의 형태나 방위체제 관련 지식이 이후 일본의 방위체제를 세우는데 토대를 마련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藤原京은 일본이 한반도정세에 개입을 포기하고 율령국가의 건설에만 전념하는 과정 속에서 조영되었다. 이것에는 종래와 같은 국지적인 방위시설은 동반하지 않고, 천황을 정점으로 한 율령국가의 권력을 과시하는 기능이 강조되었다.
그 구상에서 조영·천도에 이르는 시기는 일본과 신라가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한 시기와 연결되지만, 신라왕경과 등원경은 형태나 설계원리 상에서 다른 점이 많고, 양자의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신라가 일본에 적극적인 통교를 추구한 것은 대당 정책상의 이유 때문이었지만, 당시 신라를 종속국으로 보는 일본의 입장에서 내외에 과시하는 무대장치였던 도성 건설을 하는데 신라왕경을 모방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이 모범으로 삼고, 국내에서 실현을 목표로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도성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