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죽막동유적에서 발견된 유물과 그 성격
3. 죽막동유적의 쇠퇴
4. 태안마애삼존불의 조성
5. 맺음말
요약
죽막동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원거리 항해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제사유적지이다. 이 유적에서는 상당량의 무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무기류를 근거로 군사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도 하였으나,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하여 무기류들이 해난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공헌물로 사용되었음을 밝혀 보았다.
6세기 중반이후 죽막동유적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 유적이 쇠퇴한 이유를 백제가 무녕왕이후 태안반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고, 북조와의 교류가 증가 되는 당시의 상황에서 찾아보았다. 6세기 중반 이후 죽막동유적의 유물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급속히 떨어지는 것은 제사주체가 백제의 중앙세력에서 점차로 지방토착세력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이것은 죽막동이 점차로 백제의 대중국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태안반도를 확보한 이후 태안반도를 대중국항구로서 중요시 여기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신단의 배가 안전하게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양에서 최단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죽막동에서 출발한 배라 하더라도 태안반도까지 북상하여야 했다. 여기에서 대양을 건너는 것이 남조로나 북조로의 가장 단거리를 확보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백제에서 6세기 중반 이후 북조로의 사신 파견이 증가되는 것도 죽막동보다는 태안반도가 대중국항구로서의 이점을 갖는 이유였다.
사신단이 파견될 때 해양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제사가 지내어진다. 이때 사신단과 선원들의 제사체계는 불교의 성행 이후 점차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선원들은 민간신앙적인 요소를 오래 동안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신단들은 불교의 발전으로 부처의 수호를 받는 것이 오히려 보다 더 위안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에 사신단들이 안전한 귀국을 염우너하거나, 안전한 귀국을 감사드리는 마음에서 점차 불상을 조상하는 일이 일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것이 결국 태안이나 서산의 마애불 조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복적인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어, 태안의 마애불에서 나타나듯이 특별한 경전적인 배경은 약화되고 해양의 안전을 도모해준다는 관음신앙이 주로 믿어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