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국가제사로는 시조동명묘와 제천사지가 있다. 전자는 국가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상징의 표현으로 보기 무리가 있다. 이는 시조전승에서 알 수 있듯이 건국시조가 신격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던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주변 마한 세력의 영향력에 놓였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는 그만큼 낮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백제는 왕실과 지배귀족집단의 분란이 있을 경우 범부여계 공동시조인 동명을 모신 시조묘의례를 통해 지배집단 내 결속을 의도하였다. 오히려 왕실의 신성성과 지배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은 천지에 대한 제사로 제천사지가 남쪽에서 행해지는 것은 중국 천자가 행하는 교제와 같은 형식이다. 이는 백제 왕실이 신성성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때 시조동명묘와 제천사지는 어느 정도 위상차가 있었을 것이다. 신라 사례를 따라 구성하면 제천사지와 동명묘는 대사 혹은 별사, 특사와 같은 지위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산천제사와 사해에 포함될 수 있는 제사도 있었다. 산천제사의 제장으로는 삼산급에 해당하는 부아악, 횡악, 숭산과 오악급에 해당하는 겸악, 화악, 부산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사해로는 미릉변과 죽막동이 해당된다. 그러나 이런 체계가 반드시 중국이나 신라의 사전체계와 똑같이 그대로 편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중국이나 신라 경우처럼 일정 등급 갖는 제사들이 일정한 틀에 따라 편제되었을 것이다.
그 외 기록에서 백제의 국가제사에 포함될 수 있는 제장을 언급하고 이들 제장이 백제의 영역확장 과정에서 사전편제나 혹은 사전의 재편 때 새로 등록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또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전투가 자주 벌어졌거나 고이왕대 군사사열이 이루어졌던 석천 등과 관미성처럼 군사요지로 기능했던 곳도 제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다. 기록에 없으나 온조왕사당이나 온조왕대 세운 국모묘도 국가제사의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