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교류는 전래라는 전해주는 입장과 수용이라는 받아들이는 입장의 상호관계를 모두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래의 입장에서 상국이 속국에 내리는 하사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불교 교류를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하사, 일본은 백제로부터 증여로 파악하는 것은 몰역사적인 접근방법이다. 일본서기 관륵기사를 근거로 삼국사기 백제 불교수용 연대를 불신한 견해도 있으나 관륵기사를 율의 정비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면 삼국사기 백제 불교수용 연대를 믿을 수 있다. 불교 수용 이유는 종래 천신의 권위를 이용해 왕권 정당성을 추구하였으나 왕계가 변하는 등 문제가 생기자 새로운 권위를 담보할 수 있는 이념의 필요성에서 접근하였다. 불교의 계율관은 율령체제로 국가를 정비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불교 수용은 초고계와 고이계 두 왕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두 계승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성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백제의 불교 수용 과정에 10명의 승려가 갖추어지고 사찰이 창건되었음에서 초기 단계에 불법승 3보가 갖추어졌고, 특히 정식 승려를 배출하거나 단속할 수 있는 최소 승가인원인 10명의 승려를 주목한다. 불교 수용시 받아들인 교설은 기본적으로 현세의 복을 구하는 것이었고 왕의 권위와 나라의 안정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이나 붓다에 비기어 권위의 배경으로 삼았다.
백제의 불교 수용에는 왕실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하였지만 해씨의 역할도 컸다. 해씨는 아신왕의 아들 전지왕을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새로운 왕비족이 되었다. 이후 해수가 내법좌평을, 해구가 병관좌평을 맡게 되어 대외업무와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내법좌평은 후대 육전조직의 예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의나 대외관계 불교 등의 일을 맡기도 하였다. 내법좌평 해수는 비유왕대 상좌평에 오름으로써 그 세력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후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화되었다. 개로왕은 약화된 왕권을 견제하기 위하여 왕족을 정치 일선에 복귀시키고 유교적 정치이념의 요소를 가미하였다. 특히 해씨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 승려 도림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 내부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전사라는 시련을 안겨주었다. 백제는 지배층 내부의 결속과 도림에 의해 분열된 불교계를 다시 통합하는 것으로 성왕대 이르러 비로소 달성될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