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서는 사택지적비의 주인공인 사택지적의 불교신앙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사택지적의 불교신앙을 검토하기에 앞서 사택씨(사씨) 귀족가문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인물을 몇 명 검토해 보았지만 내법좌평 사약사 외에는 이렇다 할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사택지적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비문에 보이는 보탑이나 전당 등에서 불교적 요소를 비문의 내용이나 비석에 붉은 칠을 한 것 등에서 도교적 요소를 언급하였을 뿐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지만 여기서는 법화신앙과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보았다. 기존연구에서는 사택씨(사씨)라는 귀족가문의 원사(願寺)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였지만 지적과 대통불의 관계를 통해서 왕실과의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검토해보았다. 지적은 대통불의 아들, 전륜성왕의 손자로 장차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동방을 지키는 아촉불이 된 인물이다. 사택지적의 선대가 활약했던 위덕왕은 대통부롤 자처했으며 사택씨 가문은 위덕왕을 떠받드는 지적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택지적이 지적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바로 대통불로 자처한 위덕왕대이며 그가 주로 활약한 시대는 무왕과 의자왕대이다. 위덕왕은 성왕의 전사로 인한 패전의 책임 추궁을 신료들에게 받는가하면 건방지신을 믿지 않았다는 사상적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건방지신에 대한 논의는 성왕 말년 겸익과 육후를 중심으로 한 유불의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성왕대 이래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사택씨는 사택지적을 통해서 자신들은 바로 대통불 위덕왕의 아들로서 법화경에 나오는 전륜성왕-대통불-지적(석가모니)의 계보를 실현시켜 왕권의 신성성과 사택씨 귀족가문의 특권성을 강조하여 위덕왕대의 정치사상적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다. 사택지적의 정계 은퇴는 지금까지 백제 사상계를 지탱해온 불교계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는 백제 멸망의 한 요인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거시적으로 문제를 제시해보았는데 보다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