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仁이 日本에 건너간 연대에 대해서 《古事記》는 막연히 應神天皇代라 하고 백제의 照古王때라 하였으며, 《日本書紀》는 應神天皇 16년 2월에 王仁이 일본에 왔다고 하였다. 『日本書紀』의 紀年에 의하면 이해는 서기 285년으로 백제 古爾王 52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日本書紀》의 기년 중 神功紀, 應神紀, 仁德紀 부분은 실제 연대보다 干支二運 즉 120년 올렸기 때문에 120년을 내려야 한다. 그러면 應神天皇 16년은 서기 405년 百濟 阿華王 14년이 된다. 《日本書紀》는 “是歲 百濟 阿花王 夢”이라 하였는데 《三國史記》의 阿華王 十四年 조의 “秋九月 王夢”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王仁이 일본에 건너간 연대는 《古事記》의 照古王代는 잘못이고, 서기 405년 백제 阿華王 14년이 된다. 《三國史記》에 아신왕 6년 5월 “왕이 倭國과 우호를 맺고 태자곤지를 볼모로 삼았다.” 또 王仁 渡日하기 2년 전인 12년 2월에 “倭國에서 使者가 오니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등의 기록과 같이 백제는 왜국과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뿐 아니라 백제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된 시기였다. 이 당시, 백제는 북방으로는 고구려 광개토왕군의 침공을 받았고 신라와는 불화하여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한 때였다.
王仁은 和爾 또는 王爾로도 표기되었고, 博士란 일본의 제도상의 명칭이 아니라 일본의 주석자가 지적했듯이 막연히 學者라는 칭호 같다. 그리고 阿知吉師, 和爾吉師의 吉師는 일종의 존칭 같은데, 신라 17관등 중 14관등에 吉知 혹은 稽知, 吉次가 음이 같아서 관계가 있는 듯하다. 阿直岐는 阿直岐史의 시조가 되었고, 王仁의 후예는 書首의 또는 文首 또는 西文氏라고도 하였다. ‘文’이란 氏名은 文籍을 장악한다는 데에 연유하였다. 이들은 河內지역 거주의 여러 史姓 중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王仁의 후예는 번영하여 氏名을 고쳐 그 本系는 西文, 武生, 藏의 三氏를 칭하여, 文宿禰, 武生宿禰, 櫻野首 등이 있었다. 王仁을 시조로 하는 氏族 중에는 후대에 윤색된 것도 있을 것이다. 일본 奈良시대에 명승 行基(668-745)의 墓誌에 “俗姓高志氏¨¨¨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焉”의 내용은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