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1. 武烈紀以前 記錄에 나타난 韓國古代史像2. 繼體․欽明紀에 나타난 韓國古代史像3. 敏達紀以後 記錄에 나타난 韓國古代史像맺음말
요약
《日本書紀》의 한반도 관계 기록들은 사료적 성격에 따라 武烈紀 이전 기록과 繼體․欽明紀의 기록 및 敏達紀 이후의 기록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日本書紀》 무열기 이전 기록에 나타난 4~5세기의 한국고대사 像으로서 논의한 것은, 첫 번째로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잦은 전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해 갔다. 이들의 모국은 대체로 백제와 가야였고, 그들의 상당수는 왜에서 귀족가문으로 성장했다. 두 번째로 4~5세기에 왜와의 관계는 신라는 소극적, 백제는 적극적이었으며 고구려는 소원한 상태였고, 가야는 빈번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부실하다. 4~5세기의 대왜교섭은 가야 및 백제가 대등하게 주도하였을 것이나, 《日本書紀》 초기기록이 가야가 없어진 이후의 한반도 인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한반도는 왜보다 기술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는 일본 고대문화의 성장이 백제와 신라의 도움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을 반영한다.
다음으로 《日本書紀》 계체․흠명기에 나타난 6세기 전반 및 중후반의 한국고대사 像은, 첫 번째로 한반도에서 왜국으로의 이주민이 많지 않으나, 이미 이주해있는 한반도계 주민들이 왜국의 정권에 의하여 정비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대왜 교류와 문화 전수는 거의 백제가 주도하였다. 세 번째로 《百濟本紀》 계통의 자료들을 통하여, 가야지역을 둘러싼 백제, 신라, 왜국의 각축 과정과 가야연맹의 상황 및 멸망 과정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일본서기》민달기 이후에 나타난 6세기 후반 이후 7세기말까지의 한국고대사 像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백제가 멸망한 663년 이후로 한반도에서 왜국으로의 이주민이 많았으며, 그들은 주로 백제와 고구려 계통의 유망민이었다. 그러나 4~5세기의 이민자들과 달리 대개 일본 귀족의 씨성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을 차이로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시기 삼국은 왜국에 대하여 경쟁적으로 공식적인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그 횟수나 규모도 서로 비슷하였으며, 이는 민달기 이후 기록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삼국의 대왜 외교 경쟁이 활발하였던 것은 삼국간의 전쟁상황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세 번째로, 민달기 이후 여러 기사들 속에서 삼국의 전쟁과 관련된 정보를 보탤 수 있었다. 특히 백제 부흥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한국이나 중국측 자료에 없는 원사료의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