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條에 보이는 건국설화와 도읍지 문제, 그리고 5부제의 성격에 대한 검토를 통해 백제 국가 형성기의 모습을 복원해 보고자 하였다.
먼저 백제국가 형성과 관련해 건국설화에 주목해 보았다. 건국설화의 검토를 통해 온조왕대에 일어난 몇 년간의 기록이 건국과정으로 축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초기의 미추홀 중심의 비류계에서 온조계로 세력이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위례성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미추홀에 일정기간 머물렀으며, 이 때문에 비류의 미추홀세력 이야기가 건국설화 속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건국설화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백제가 부여계 유이민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해 건국한 국호는 십제였다. 十濟를 토대로 伯濟가 결합됨으로써 百濟의 국호가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백제는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 집단이 기존의 토착세력과의 결합에 의해 건국한 사회로서 복합성이 강한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한편 한성시대의 도성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위례성→한성(하남위례성)→한성+한산성으로 변화해 갔음을 알 수 있었다. 도성의 정비과정을 거치게 된 백제는 지방에 대한 지배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5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방통치체제 정비는 말갈과 낙랑에 대한 통제와 내부적인 결속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온조왕 31년과 33년에 형성된 동서남북부의 부제는 방위에 따른 인위적인 분획이었으며, 중앙과 함께 전국을 5부로 나눈 지방통치구획의 단위였다. 그런데 ‘部’명을 인명 앞에 칭하는 지방세력들도 엿볼 수 있었다. 중앙에서는 재지세력에 대한 관직수여를 통해 ‘부제’ 운영의 실효성을 강화시켰으며, 이들은 공적 지배질서 체계로 편입되어 ‘부’에서의 지배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당시 중앙통치권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제의 ‘부’가 방위부인 지방통치제도로서의 특징을 일찍이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 초기 연맹적 성격의 부체제가 중앙집권 단계의 상대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통치체제의 하나의 양상으로서, 이는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그 규모나 중앙집권력의 정도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백제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온조왕대에 이루어진 지방지배체제의 초보적 양상인 5부제는 바로 백제 국가가 지방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표출하고 이를 중앙으로 웅집시켜 나가려 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의 발전과정에 있어 집권국가의 전단계로서 연맹적 성격의 부체제를 똑같이 설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