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사료에서 본 백제의 효 사상
III. 양에 있어서 효사상의 성격
IV. 효사상의 수용과 대통사의 창건
V. 효사상의 정착과 태위의 불교
VI. 맺음말
요약
본고는 백제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애매한 점이 많던 孝사상에 대하여 그 성격을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우선 백제의 효사상은 군신관계로 기안된 忠孝보다는 순수한 親子愛를 표현한 성격이 보다 강하다. 또한 威德王이 아버지를 위해 출가를 표명하는 효사상과 佛事活動의 관계도 지적할 수 있지만 위덕왕은 무엇보다 禮思想에 심취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주목되는 것이 梁의 효사상이다. 梁武帝는 보급하기 위해 『孝經』을 바탕으로 李思賦 등 많은 서적을 제작하였지만,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를 표현하기 위해 『孝經』의 핵심적 어구를 붙인 大愛敬寺들의 사원을 창건한 것을 강조한다. 즉 明孝道와 建寺, 捨身은 함께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효사상이 백제에 수용되었을 527년에 爲梁武帝를 내세우고 대통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그것은 무제가 편찬한 효사부 등의 교본을 사상적 근거로 이루어졌다고 짐작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의미로 무제에 대한 효도를 표명하였지 않을까 짐작된다. 게다가 奉爲聖王 기록을 통해서는 奉爲의 불교에는 誓盟의 의미도 포함하여 그 대상이 아버지 성왕임을 명시하는 것으로 효사상이 위덕왕과 군신의 사이에서 誓盟의 역할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덕왕 즉위 때에 효사상이 강조되는 것도 순수한 親子愛를 중시한 조화적 성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이 기록은 능산리사원의 창건과 관련시켜 해석할 수 있지만, 그들이 효도를 공유해서 王權寺院의 창건을 추진하였다면, 효 사상에 대한 생각이 양 무제其의 수준에까지 도달하고 있던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法王의 諱가 孝順인 것도 능산리 사원의 효과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6세기 전반에 수용된 효사상은 위덕왕대에 들어 완전히 백제 왕권을 지지하는 정치이념으로서 정착된 것이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