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아미타신앙을 알게 된 것은 사비시대 초기로 보인다. 이는 충남 예산지역에서 사면석불이 조성되고 있는 것에서 살펴진다. 그리고 신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위덕왕대가 아닐까 한다. 위덕왕대에는 삼론학이 발전하고 있으며, 열반경과 더불어 법화경이 크게 설해지고 있다. 열반경과 법화경, 그리고 삼론학은 불성사상과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불성사상은 아미타신앙이 전개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백제사회에 아미타신앙이 전개되는 모습은 사택지적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택지적비는 법화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오히려 아미타신앙과 관련하여 살펴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사택지적비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 아미타신앙을 통해 아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삼배왕생법 중 중배자들의 공덕과 같다는 점에서 착안된다. 중배자들은 비록 출가하여 사문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위없는 보리심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탑과 불상 등을 조성하는 등의 공덕을 통해 아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택지적비의 내용은 아미타신앙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백제사회에서 아미타신앙이 전개되는 모습은 연기지역에서 발견된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관련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불비상은 문무왕 13년(673)에 조성된 것으로 백제 멸망 이후의 것이다. 그런데 이 불비상의 조각수법이나 내용에서 백제유민들에 의해 조성된 것이 확실시 된다. 그리고 조성수법 또한 백제의 불상조성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불비상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통해 백제 아미타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향도 250인의 존재이다. 250인에는 적어도 노동력 공덕을 보시한 일반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 말기에 있어 아미타신앙은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열반경에서 설하는 불성론이 전개되고 있었던 만큼,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사비시대 초기에 수용된 아미타신앙은 의자왕대에 일반민들에게까지 수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아미타신앙의 백제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멸망 이후에도 연기지역에서 아미타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