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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문자고(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文字考)

  • 분류 문헌 > 기타
  • 권호수 제12집
  • 저자 한연석
  • 발행일 1998년
  • 게재지 한문교육연구
  • 발행처 한국한문교육학회

목차

Ⅰ. 序言
Ⅱ. 銘文의 楷定과 釋讀
Ⅲ. 銘文의 字形分析
Ⅳ. 餘言

요약

위진남북조대와 그리고 멀리는 한 대의 문자 상황은 중국 역대 朝代 가운데 가장 혼란하였던 시기였으며, 비문과 묘지에는 일반적으로 고졸한 문자체를 사용하는 중국의 경항이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의 명문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0자의 본 명문자 가운데 “兄”, “亥”, “妹”, “供” 등이 俗子인 것은 이러한 중국의 문자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본 명문은 왕실의 장엄하고 엄숙한 종교의식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식 기록에 속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당시 백제의 위진남북조 한문 수용과 자생적인 소화에 상당한 경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미 속자가 정자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사용이 공고해졌음을 의미한다.
명문자 가운데 濟의 우측 “”, 歳의 상하 止자 “”와 “”, 亥의 상부 “” 등 構件의 寫法과 兄을 “”, 年을 “”, 在를 “”로 쓴 것은 주로 한 대 이후에 보이는 것들로 본 명문이 위진남북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亥의 상부 “二”의 寫法에서 위진시 대부분 第 一筆을 橫筆로 썼으나, 이를 半竪筆로 쓴 것은 해서가 정착되고 난 후의 것으로 상당한 후기의 필법에 해당한다.
한편 亥의 결구에서 맨 아래 構件 人을 우측에 배치한 것과 供의 우상부 “”를 초서화 한 것 등은 현존 중국 字書나 字表에 보이지 않는 파격적인 변형체이다. 이러한 것들은 본 명문자가 위진남북조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漢代 이후 백제 고유의 자생적인 한문의 수용과 소화를 나타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필자 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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