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천도이후 동성왕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웅진부근 지역은 토착세력이 중앙정계로 흡수되어 통치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중앙정부에서 각 성의 중요성에 따라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토착세력이 강한 지역에는 입점리 유적과 신촌리 9호분 등과 같은 왕릉 규모의 고분을 축조할 정도의 토착세력가가 존재하였다. 동성왕은 중앙의 귀족과 왕족들을 이 지역의 왕·후로 파견하였다. 이는 토착세력가의 힘을 이용하여 토착세력이 강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들 왕·후는 임지가 옮겨지지만 왕·후라는 칭호 사용과 중국에 요청한 군호의 품계가 백제왕에 준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 지역에서 상당히 독자적인 통치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중앙집권화는 순조롭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토착세력가에 대한 제압이 어느 정도 끝난 시점인 무령왕대에는 왕·후를 파견하는 방식에서 담로제로 전환하였다.
6세기 초반 성립된 담로제는 전국을 22지역으로 행정구획화하고 중요 성·읍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역 내의 성·촌을 관할한 제도였다. 이 무렵 옹관묘를 축조하던 영산강 유역에는 백제 중앙의 묘제인 석실분이 출현하고 있어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이전보다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석실분 피장자는 출토유물을 볼 때 상당한 세력, 즉 성(현) 정도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착세력가로 생각된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담로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토착세력가를 제어하며 지방통치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경우 효과적 통치에 어려움이 있어 6세기 중반 경에는 담로를 관할하는 방이 설치되어 5부-6방제가 확립되었다.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확대시키는 과정인 6세기 초반 경에는 수도에 5부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토착세력가를 수도로 이주시키면서 귀족들의 주거지를 행정구획화한 것이다. 5부제는 귀족들의 기반이 약해지며 5부가 방위에 따라 지역을 구분하는 부로 새로 개편되었다. 사비천도 이후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강화됨에 따라 왕경 5부의 범위는 확장되었고 부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 부 밑에 항이라는 하부행정조직을 편제했다. 5부제는 방군성체제를 유지하였고 방의 치소는 방성과 주변의 직할영역으로 방은 관할지역 내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행정, 군사적 면에서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하부행정조직인 군을 지배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