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임나부흥회의에 초점을 맞추어 계체, 흠명기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또한 안라회의도 임나부흥회의와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여 시간적 계시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529~540년대 안라를 중심으로 전개된 가야의 자구세력과 백제의 가야자식의도를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계체, 흠명기 사료는 백제본기를 골간으로 하기에 기사 내용에 상당한 신빙성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임나부흥회의는 전적으로 이런 경향성을 바탕으로 백제가 임나부흥을 목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고찰 결과, 임나부흥회의라는 것은 실질적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일본서기 찬자 또는 백제본기 역사관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임나부흥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가야제국의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백제와 왜의 의지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백제삼서의 성격에 관해서 어떤 설을 취하든 원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의 관점에서 윤색, 왜곡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백제본기가 주로 인용된 시기가 성왕대라는 점은 이 시기 백제와 왜의 교류가 왕성했음을 방증하는 동시에 임나부흥 관념이 생길 소지가 농후한 것이다. 이같은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은 임나의 조 기원이 상징하듯이 이 지역의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라와 성왕에 의해 주도된 임나부흥회의라는 것은 결국 명목에 불과한 것이고 왜인계통으로 간주되는 인물도 실제는 안라인의 활동으로 보인다.
신라 남부가야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 문제에 관한 기존의 견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년에 맞추어 532년 김해가야의 멸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 보편적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바탕으로 고령지역에 대한 진출을 모색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임나부흥회의에 대한 검토 과정에서 확인된 바로는 김해지역은 530년대 이전에 이미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529년을 전후하여 안라를 친신라세력으로 끌어들이고 탁순국을 소멸시킴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금관국주의 투항인 것이다. 이 사건은 이 지역을 신라로 편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지 확보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남부지역 진출은 기존 견해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