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조의 대외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는 당이 백강구전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고구려 정책의 이해 때문에 왜에 저자세적인 소극적외교를 취하였다고 보아왔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결과에 의문을 품고 천지조의 대외정책을 백강구전 이후의 시기를 중심으로 한반도 정세와 관계지어 살펴보았다.
당은 백제부흥운동을 진압시킨 후 곧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전승국의 입장에서 왜에 관계개선을 요구하였다. 이에 왜는 당고종에 사신을 파견하고 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왜는 당에 대한 방비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정한 거리를 둔 당과의 관계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당의 정책에 반발한 신라가 고구려 멸망을 목전에 두고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개선을 요구해 오자, 왜는 다시 신라와 관계개선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당과 전쟁을 전개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파견되어 온 당사 및 그 영향 하에 있었다고 보여지는 백제사 등이 요구하는 군파견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생각해볼 때, 백강구전 이후 천지조의 대외정책의 기조를 전기의 경우 한반도 정세의 변화로 인한 백제원조를 구실로 한 적극적인 외교라 규정지을 수 있다면 후기는 백강구전이 왜로서는 전국력을 기울인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남긴 채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그에 따른 영향이, 이후의 한반도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중립외교를 취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대외관계를 규정한 직접적인 요인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 그 가운데에서도 백강구전에의 패전으로 야기된 당의 외교적 위협이었다. 그런데 이 점은 신라에도 공통으로 작용된 요인이었다. 이 공통된 국가적 이해가 이후의 양국의 대외관계를 규정하여 천무, 지통조에 있어서의 30여년 간에 걸친 외교단절을 가져왔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