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유역은 남북간의 육상 교통로상, 동서간의 수운 교통로상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 이래로 이곳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각축장이 되어왔음을 살펴보았다.
삼국 중 남한강 유역에 먼저 진출한 나라는 백제였다. 남한강 유역에는 고대 국가발전의 관건이었던 철 광산이 존재하였고, 또 철기와 기마문화에 익숙한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고립 분산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흡수하면서 간단없이 침입해 오던 말갈세력과 전투를 벌리면서 이 지역을 확보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4세기 말 광개토왕의 남하로 인하여 남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지배하로 귀착되었다. 특히 고구려는 충주지역을 남진 경략의 전진기지로 삼아 장차 신라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영역에 고구려군이 한동안 주둔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이를 배경으로 경북 일부지역을 영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가 왕위계승에 다른 정치적 혼란과 서변의 돌궐과의 일련의 군사적 충돌 등 내우외환을 겪게 되자, 나제 동맹군은 북진을 단행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이때 신라도 북진을 단행하여 죽령을 넘어 남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고구려로부터 10군의 땅을 공취한 것이다. 그런데 551년 신라의 북진경략은 일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5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자립화하려는 배경 속에서 북진이 4개의 교통로를 통해 꾸준히 이루어졌음을 살펴보았다. 신라의 충주점령은 551년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551년의 북진은 죽령을 넘어 주로 남한강 상류지역에 거주하던 말갈세력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가 이때 공취한 10군의 땅은 통일신라 때의 朔州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가 남한강 유역에 설치한 소경으로는 충주의 국원소경과 원주의 북원소경이다. 통일 후의 5소경은 국원소경을 중심으로 하여 그 사방에 방위명 소경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방위명 소경은 고구려와 백제 고토를 대상으로 사방에 설치하였다. 이 방위명 소경은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난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또 주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었다. 이 점은 소경이 군사적 측면보다 행정적 측면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