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혈통적으로 북부여의 왕계이며 그가 태어난 지역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다. 그가 달아나 도착한 곳은 졸본부여로, 주몽이 과부가 된 졸본부여 마지막 왕의 공주 소서노와 결혼한 후 왕이 죽자 졸본부여의 왕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졸본부여를 건국한 동명을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동명은 고리국 출신으로, 槀離란 고구려의 별칭인 高麗와 같은 음을 형성하고 있어 고구려와 매우 밀접할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은 부여의 예족과는 달리 맥족 계통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아울러 소서노의 아들로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도 동명묘를 세워 졸본부여의 시조인 동명을 받든 것을 볼 때, 그를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보는 것에는 의문점이 남게 된다. 즉 고구려나 백제는 그들 모두 졸본부여에서 나왔고 그들의 공동시조가 동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여․고구려․백제가 산성과 평지성을 하나의 세트로 이용하는 도성체계를 유지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고 적석총을 묘제로 쓰고 있었던 사실로 보건대, 이들은 맥족이라는 동일한 족속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지역에는 약 800여 개에 달하는 고대 산성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 99%는 테뫼식 산성이다. 이러한 백제의 테뫼식 산성의 원류는 부여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길림시 동쪽 교외 東團山城과 南城子城의 원형이 된 성터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지』 권38에 ‘성책은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형의 성책인 ‘圓柵’은 고대의 예족 또는 부여족의 독자적 축성법을 이용한 것으로, 부여 고지에는 소규모의 불규칙적인 원형의 산성, 즉 테뫼식 산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백제는 고로봉식 산성이나 포곡식 산성이 대부분인 고구려보다는 이 부여의 산성 전통을 더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맥족이 주묘제로 사용한 적석총은 고조선 이전 시기인 大凌河지역의 홍산문화를 시작으로 고조선의 崗上․樓上積石塚등을 거쳐 고구려 초기의 환인 高力墓子古墳群등의 고구려 적석총이 있다.
그 외에 백제에서는 서울의 석촌동 적석총,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 청원군 강내명 석화리와 연기군 조치원 등으로 이어지는 매우 기나긴 전통을 지닌다. 한편 맥국이 있었던 춘천의 중도․고산과 春城郡 산천리․신매리 등에 적석총이 나타나고 있어 맥족과 적석총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더욱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