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위덕왕 대의 사찰 조영사업
III. 무왕 대의 사찰 조영사업
IV. 계획적 사찰 조영사업
V. 맺음말
요약
백제에서는 사찰 조영사업이 장기적 계획 하에 주기적으로 진행되었다.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의 창건연대는 사리기의 명문을 통해 각각 567년과 577년으로 밝혀졌다. 즉 10년이란 시기적 차이를 두고 창건 공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외 문헌기록을 통해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사찰은 527년 대통사와 616년 오함사이다. 대통사는 능산리사지․왕흥사처럼 ‘△△7’년에 창건되었고 오함사는 616년에 낙성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백제는 ‘△△7’년 또는 이를 기준해서 약 10년 단위로 국가나 왕실이 주체가 되어 사찰 조영 사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제의 대표적 사찰이라 할 수 있는 미륵사도 간지명인각와를 통해 627년에 가장 큰 창건공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 또한 ‘△△7’년에 일어난 계획적 조영사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이와 같은 계획적 사찰 조영이 비단 국내에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백제의 지원을 받아 창건된 일본 최초의 본격적 사찰 비조사도 불교전쟁에서 승리한 587년에 발원하였다.
527~627년 중 537년, 547년, 557년, 607년, 617년에 창건된 사찰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새롭게 발견될 것을 기대해 본다. 그러나 이에 앞서 538년 사비천도, 557년 위덕왕의 실질적 즉위, 606년 비조사 본존 완성, 616년 오함사 낙성은 칭원법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1년이란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 모두 ‘△△7’년의 계획적 조영사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조영사업이 527년부터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이전의 미미했던 백제불교가 성왕 대에 이르러 정치․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불교중흥을 시작한 원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27년을 마지막으로 국가 왕실 주체의 계획적 조영사업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유는 이해가 정확히 527년으로부터 100년째에 해당하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즉 백제의 사찰 조영사업은 국가와 왕실이 주체가 되어 100년 계획으로 수립되었음을 의미하며 마지막 사업이 백제 최대의 창대한 미륵사였다는 점도 이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