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王興寺 창건과 造佛工·造寺工의 渡日
III. 丁巳年 조영사업과 飛鳥寺 낙성
IV. 烏含寺와 新堂廢寺
V. 泗沘遷都와 일본의 佛敎公傳
VI. 大通寺 창건과 飛鳥寺 창건
VII. 맺음말
요약
백제와 고대일본의 사찰 조영사업은 밀접하게 이루어졌다. 사찰 조영사업의 절대연대를 통해 양국의 불교교섭을 해명한 것은 처음으로 시도된 연구결과이며 본 논문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요약 하면, 위덕왕은 왕흥사를 창건한 해(577)에 造佛工․造寺工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백제는 성왕대부터 일본에 백제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술자를 파견한 것은 처음이었다. 죽은 왕자를 위해 창건한 왕흥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왕권과 사상적 기반인 불교를 흥륭시키기 위함이다. 조사공을 파견한 것도 이를 기념하여 이미 일본에 전래된 백제불교의 정착과 흥륭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백제의 지원을 받은 비조사는 596년에 낙성되었다. 그리고 1년 후 백제에서는 동시다발적인 조영사업이 이루어진다. 비조사 낙성을 계기로 정사년조영사업이 가능했을 수도 있고 칭원법의 오차범위를 생각했을 때 같은 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두 사업이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된다.
오함사는 616년에 낙성한 사찰로 추정되는데, 일본 南河內 最古의 사지라 할 수 있는 신당폐사는 지명과 백제계 수막새 등을 통해 오함사와 동명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사찰이 위치한 곳은 백제계씨족의 본거지로 비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건시기도 오함사와 비슷한 7세기 제1/4반기로 동명의 사찰이 같은 시기에 백제와 일본에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오함사를 매개로한 양국의 불교교섭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찰 조영사업 외에 양국의 교섭을 엿볼 수 있는 불교정책으로 사비천도와 불교공전을 들 수 있다. 일본의 불교공전은 538년 설이 지배적이다. 이 해는 성왕이 불교중흥을 위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시기로 동년 동왕에 의해 일본에 불교를 전래했다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즉 성왕은 사비천도를 계기로 백제불교의 중흥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불교가 정착되기를 기원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유사한 시기 뿐 아니라 60주년을 기념한 불교교섭도 상정된다. 백제 최초의 본격적 사찰인 대통사는 527년에 창건되었고 일본 최초의 본격적 사찰인 비조사는 60년 후인 587년 창건되었다. 비조사 조영사업에는 위덕왕이 백제 기술자집단을 파견할 정도로 관여하였는데 백제 최초의 사찰과 정확히 한 甲子 뒤에 일본 최초의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것은 양국의 불교교섭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백제와 고대일본의 불교정책, 특히 사찰조영사업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백제의 ‘△△7’년 조영사업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추정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