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사리기 명문」에 대한 판독과 해석
III. 「사리기 명문」을 통해 밝혀진 위덕왕대의 정치 상황
IV. 맺음말
요약
<왕흥사지 사리기 명문> 검토를 통해 ‘亡王子’가 지닌 의미를 ‘三王子’로 인식하고자 했다. 즉 佛舍利의 異蹟 현상이 ‘망왕자’의 숫자가 모두 3명임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이 경우는 <명문>의 ‘百濟王 昌’이 기실은 ‘百濟王 曷’로 釋文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되었다. 즉 ‘망’자로 석문되지만 이 글자의 속성은 ‘삼’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삼왕자’든 ‘망왕자’든 왕자가 사망했다는 본질 자체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 만큼 ‘망왕자’로 석문해도 위덕왕 직계의 단절은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명문>의 ‘立刹’을 ‘탑 건립’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럼에 따라 왕흥사지 목탑은 위덕왕이 전몰한 왕자들을 추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한 것으로 밝혔다. 이러한 願塔의 건립은 왕족들의 供養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최고의 공양품은 불사리였다. 위덕왕은 원탑 건립을 통해 왕실의 결속을 도모하는 한편, 불사리 공양을 통해 차별화된 국왕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했다. 위덕왕 嫡子의 단절에 따라 왕의는 혜왕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혜왕계 왕실은 자신들이 즉위하는데 단서가 되었던 3왕자 추복 기원 목탑 부지에 왕흥사라는 호국사찰을 창건하여 부여씨 왕실 전체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즉 왕실 차원의 추복탑에서 국가적 호국사찰로 그 기능을 강화하고 확대시킨 것이다.
<명문> 분석을 통해 위덕왕은 불사리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分與를 통해 왕즉불 사상을 고취시킴으로써 국왕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 혜왕계인 법왕의 시호와 放生 儀式은 이러한 추세에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리가 2매에서 3매로 화했다는 異蹟은 익산 제석정사 목탑 수정병 속의 불사리와 유사한 應驗 현상으로 간주된다. 왕흥사지 목탑 사리의 分顆 異蹟은 위덕왕 발원탑 건립의 정당성과 자신이 추진한 전쟁의 정당성을 含意하고 있다. 즉 3왕자의 殉國을 敗死가 아닌 聖戰 속의 순교적인 殉死로 그 의미를 승화시키는 기제로 작동시켰다.
한편 ‘왕자’의 용례는 신분적 개념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王弟’에게도 적용됨을 확인하였다. 이와 관련해 ‘아좌왕자’의 경우도 정황상 왕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실제 북구주 稻佐神社 기록을 통해 아좌왕자는 성왕의 왕자 즉, 위덕왕의 왕제로 한층 명료하게 밝혀졌다. 위덕왕 말년에 왕위계승권을 지닌 왕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도 위덕왕 ‘삼왕자’의 사망은 정치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