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위덕왕 대의 정토신앙
3. 석가와 전륜성왕, 그리고 미륵신앙
4. 사리의 봉안과 왕권
5. 맺음말
요약
위덕왕은 재위 24년인 577년에 왕흥사지에 사리를 봉안한다. 이 과정에서 사리함에 명문을 남기고 있다. 이 명문은 당시 백제불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리봉안의 목적은 죽은 왕자의 정토왕생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명문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의 정토신앙은 석가불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신앙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사리의 봉안과정에서 석가불신앙과 전륜성왕, 그리고 미륵신앙의 관련성이 보인다. 즉, 석가불을 신앙하는 정토신앙적인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사리의 봉안과 관련이 있다. 사리는 석가불의 열반 후 얻어진 진신으로 석가불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전을 보면, 사리를 봉안하는 주체로 전륜성왕이 주목된다. 그리고 역사상 전륜성왕으로 일컬어지는 아소카왕은 8만 4천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전륜성왕과 사리의 봉안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사리를 봉안하는 과정에서 미륵신앙이 함께한다. 이는 전륜성왕인 아소카왕의 경우에서 살펴진다.
위덕왕은 사리를 봉안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의식을 치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록 후대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수의 인수사리탑 조성과정에서의 모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왜에서 비조사에 찰주를 세우는 과정에서 치른 의식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진행과정은 일정한 질서를 요구하는데,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군신 간의 질서와 관련이 있다.
위덕왕은 577년에 왕흥사지 목탑지에 사리를 봉안하면서 의식을 거행하고, 죽은 왕자의 정토왕생을 발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을 통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의 지배질서를 표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석가불신앙과 전륜성왕, 그리고 미륵신앙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