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代에 편찬된 《晋書》에는 百濟 初期史에 관련된 몇 가지의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晋書》에 의하면 馬韓의 역사 활동이 3세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三國史記》에는 百濟가 溫祚王27年에 완전하게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되고 있어 적지않은 혼란을 초래해 왔다. 필자는 우선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기 위하여 《三國史記》에서 溫祚王代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馬韓의 실체를 百濟의 南進과정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三國史記》의 기록대로 溫祚王代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正始 6,7年 魏의 동방침입에서 비롯된 韓과 濊의 혼란을 틈타 古尔王代에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써 《晋書》에 기록된 馬韓은 《三國史記》 所傳의 馬韓과 同一體로서가 아닌 시기적으로 차이를 갖는 馬韓으로서 해석하게 되었다. 즉 《晋書》에 기록된 馬韓의 활동은 百濟의 古尔王代 차령, 금강이북의 目支國 중심의 세력을 잠식당한 이후의 馬韓으로 차령 금강 이남에 위치하던 馬韓의 잔여세력이었던 것이다. 실로 《三國志》에 표현된 馬韓54국은 百濟의 南進과정에서 일시에 병합될 수 있을 정도의 응집력이 있던 정치체제라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百濟의 점진적인 남진에 의해 점진적으로 흡수된 세력이었던 것이다. 한편 《晋書》에는 345년에 만주지역에 위치했던 慕容氏의 세력과 관련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의 해석을 서로 달리하여 만주백제설을 피력하기도 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사실의 방증자료로써 인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모용씨가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상에서 실제로 百濟와 관련이 없다는 점과 그리고 《三國志》<東夷傳>에 百濟가 立傳되어있지 않은 까닭에서 이는 실제 百濟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樂浪, 帶方의 요서이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실로 樂浪, 帶方은 4세기 초 모용씨의 세력하인 요서지방으로 귀속되었었는데 그 뒤 모용씨는 요서지방의 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상에서 모용씨에게 흡수되기를 거부하는 樂浪, 帶方의 이주민을 당시의 百濟王=樂浪太守의 관념에서 百濟의 徙民으로 표현하게 되고 실제의 전쟁의 결과에서 발생한 句麗, 宇文, 段部의 徙民과 함께 취급되어 同一 文章에 기록케 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