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寧王의 出自에 대해 『三國史記』의 編者는 그를 백제 제 24대 東城王(479~501)의 제 2子라고 한다. 그러나 『日本書紀』武烈紀 四年 四月條에는 『百濟新撰』을 引用했다는 기사에서는 「斯麻王은 昆支王의 太子이고 末多王 과는 異母兄」의 관계라고 해 그를 昆支의 아들로 보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맞는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사실 斯麻王의 出自에 대해서는 史書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혼선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斯麻王의 誌石에는 그의 生涯를 62세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461년에 「各羅島」에서 誕生하였다고 기록한 『日本書紀』雄略紀 五年 六月 一日 條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斯麻君을 蓋鹵王의 太子로 본 雄略紀의 기사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斯麻君은 蓋鹵王의 太子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의 생모는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만삭의 몸으로서 渡海했으며 向倭 도중 그를 筑紫에서 출산한 것이다. 그러나 『日本書紀』의 기사와 같이 그는 부왕(蓋鹵王)의 뜻에 따라 本國으로 送還된 것은 아니고, 계속 倭京에 머무르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父王과 兄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솟구치는 원한으로 「軌敵句麗」에 대해서는 항상 초 강경책을 써왔던 것이다. 그리하려 그는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失地를 회복하고 國基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사서에서도 그의 청소년시절의 행방에 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는데 일본학계의 원로 山尾幸久(立命館大學)교수는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武寧王은 청소년시절에 天皇의 「質」로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견해는 일본학계의 다수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昆支王이나 斯麻君은 모두 天皇의 「質」은 아니며, 백제왕(蓋鹵王)의 侯로써 倭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71년 7월 공주에서 출토한 왕의 誌石에는 왕의 죽음을 「崩」자로 명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생전에 「大王」으로 재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년기와 장년기를 倭京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백제왕의 「侯王」인 「倭王」과 같은 왕으로서 재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백제왕으로 재위하는 2-여 년 동안 侯國․倭에서는 백제로부터의 수많은 最先進文物이 유입되었다고 『日本書紀』를 비롯한 많은 사서는 이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畿」(畿內)의 모습은 새로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추세는 그의 태자인 성왕대에 가서는 더욱 더 활발해졌으며, 그리하여 고대일본(왜국)의 律令制度는 굳건한 반석 위에 노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