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중국문헌의 성격
II. 중국문헌에 나타난 한국 고대의 사회상
1. 고구려사회
2. 백제사회
3. 신라사회
4. 발해사회
요약
한국 고대사는 일찍부터 문헌의 한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금석문이나 유물․유적발견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외국문헌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고구려가 중국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삼국지』이다. 『삼국지』의 고구려상은 어느 정도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뜻하며, 평양천도 이후 사회상을 서술한 것은 『송서』, 『남제서』, 『위서』등이다. 그리고 『당서』(신․구) 등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쓰여 진 것이므로 각기 성격이 다르나 내용이 중복되거나 전후가 뒤바뀐 것이 많다. 그러나 세 가지 형태의 중국문헌이 전하는 고구려상의 내용은 고구려사회의 변화상을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중국문헌에 보여 진 백제에 대한 관심은 결국 『삼국사기』기록이 보충이라는 현실적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의 시도가 백제의 해외진출문제였다. 이와 같은 백제의 요서진출은 백제사 연구의 폭을 넓혀 줌으로써 중국문헌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의 필요성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중국문헌에 보여 진 백제상은 중국사 이해라는 기본시각 위에서 서술되었으므로, 중국과의 관계 설명이 대종을 이루기 마련이다. 백제는 고구려가 3세기의 『삼국지』에 나타나는 것에 비하면 2세기나 뒤에 중국에 알려졌으나 신라보다는 1세기 반 이상 먼저 소개되어 있다. 신라가 중국문헌에 나타난 것은 7세기 초에 만들어진 『양서』이후이다. 그만큼 중국에 늦게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진서』에는 조공의 기록이 있어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신라라는 국호 제정(503) 이후 최초로 중국에 입조한 것이 법흥왕 8년(521)의 대양조공이다. 그러므로 5세기 이후 신라의 존재가 중국에 확인되면서, 6세기 초에 신로(사로)의 후신으로서 뚜렷한 인식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발해에 대한 최초의 중국 측 기록은 『구당서』이다. 그러나 발해말갈로 연칭 되어 있어 말갈과 발해의 불가불성을 나타내게 하고 있으며, 말갈인이 발해사에 차지한 위치를 엿보게 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은 발해왕(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국왕대흠무’라고 자칭한 사실에서도 뚜렷하다. 더구나 발해가 옛 고구려 땅에 세워졌고, 대조영이 고구려별종으로 고구려가 망하자 이진충난을 계기로 그 무리를 이끌고 계루부의 고지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다만 속말갈출신인 대조영집단이 고구려가 멸망하기 훨씬 전에 고구려영역으로 이주․정착한 말갈계 고구려인이기 때문에, 고구려 별종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