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한성시기 불교의 수용과 중국의 영향
2. 웅진시기 불교의 다변화와 중국의 영향
3. 사비시기 불교의 창조적 변용과 중국의 영향
맺음말
요약
본 논문은 백제불교를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학계 동향에 대하여 비판적 검토를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간과했던 백제불교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보았다. 백제불교를 크게 한성시기, 웅진시기, 사비시기의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에 대한 중국영향을 다루었다. 한성시기 불교수용과 관련해서는 전래보다는 수용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초고계와 고이계를 초월하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개로왕은 도림을 등용하여 왕즉불의 북조 불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웅진시기는 중국불교에 만족하지 않고 겸익은 직접 범본 원전을 가져왔고, 무령왕과 왕비의 3년상은 중국의 27개월 3년상이 아닌 백제고유의 빈장의 28개월 3년상을 치렀다. 이를 통해 백제가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백제 실정에 맞는 문화를 만들어 갔던 점을 환기시키면서 대통사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대통사는 보통 백제 성왕이 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지었다고 알려져 왔지만, 『법화경』의 전륜성왕-대통불-석가모니로 이어지는 계보상의 대통불을 모시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백제 왕실을 석가와 가계와 일치시켜 성족관념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았다.
사비시기는 정림사, 능사, 왕흥사, 미륵사, 사택지적비 등을 다루었다. 사비의 정림사가 남조 양나라의 건강 종산에 있는 정림사에서 이름을 취했다는 견해에 대하여 두 절의 입지와 사비의 성림사란 절 이름이 고려시대의 이름이라는 점을 들어 비판하였다. 강변에 위치한 왕흥사의 입지를 사방이 해자로 둘러싸인 중국 동태사와 비교하였다. 미륵사 서탑지에서 발견된 왕후즉신의 해석을 『보살종도술천강신모태설광보경』을 통해 즉신성불과 연관시켰다. 미륵사가 위치한 익산을 신도로 파악하고 이를 측천무후가 낙양을 신도로 삼은 것과 비교하였다. 사택지적비의 경우 발견 당시부터 도교적 해석으로 치우쳤지만 지적이 법화신앙에 돈독했던 점을 들어 불교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본 논문이 중국영향을 비판하면서 백제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고 하여 중국불교와 백제불교의 영향관계를 고려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백제 불교를 알기 위해서 중국불교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백제불교의 특성이 여기에 묻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