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연구동향 개괄
III. 『일본서기』의 관련사료 검토
IV. 중국 측 사료의 검토
V. 『삼국사기』의 관련사료 검토
VI. 맺음말
요약
백제의 강역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학계에서 통설적 위치를 차지해온 해석은 근초고왕 24년에 백제가 馬韓의 諸勢力을 병합하며 한반도 서남해안에까지 진출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백제의 남방경략은 근초고왕대에 이미 어느 정도 종결되었다는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근초고왕대 남해안진출설의 진정한 사료적 근거는 『일본서기』에 한정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神功紀 49년조만이 우뚝 서있다. 그런데 모두가 인정하듯이 예의 神功紀 49년조는 『일본서기』내에서도 윤색과 왜곡이 특히 심한 부분이다. 물론 윤색과 왜곡을 적절히 벗겨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적지 않은 사실을 추출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떤 부분이 어느 정도나 왜곡되고 윤색되었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검증할 수 있는 연구자가 적어도 현재로서는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본고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韓․中․日 3국에 현존하는 각종 문헌사료는 백제의 南方經營에 대해 각기 시대를 달리하거나 내용을 달리하며 史實의 편린을 전한다. 따라서 이들 문헌자료에만 의거한 한-고고자료의 이용이 보다 원활해지지 않는 한- 적어도 3세기대까지의 백제의 강역확장에 대한 유추는 아직 유보할 수밖에 없다. 다만, 다소 막연하긴 해도, 현재 학계의 대체적인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樂浪郡의 멸망 무렵부터 백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그것이 근초고왕대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가정한다면, 4세기대의 남방경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 결과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벗어나 南方을 경략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중엽 이후이며, 4세기 후반의 근초고왕대에는 충남․북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熊川을 南方限界線으로 지목한 온조왕 13년조의 彊城確定記事는 근초고왕대의 事績을 소급한 것일 개연성이 크다. 근초고왕대에 博士 高興을 통해 작성하였다는 書記는 그것이 史書이든 國家文書이든 간에 彊城確定에 대한 첫 번째 정리라고 하겠으며, 이를 後代의 史家들이 自國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始祖인 온조왕대에 천도기사와 함께 일괄 수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