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으로 《三國史記》와 《日本書紀》의 兩 史書에 나타나는 百濟의 對倭國交涉關係의 成立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三國史記》에 阿莘王이 397年에 곤지를 왜국에 파견하게 된 목적은 강하게 압박하여 오는 高句麗의 공세를 倭國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新羅를 끌어들여 공세를 취하는 高句麗에 대하여 백제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倭國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新羅를 견제하고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阿莘王의 의도는 실지로 맞았다 하게하겠으며, 태자 곤지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百濟는 급박한 한 위기에서 벗어나고 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세적인 입장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百濟와 倭國과의 공식적인 교섭은 이보다 먼저 근초고왕대에 있었다 하겠다. 근초고왕은 369년에 馬韓의 잔여세력을 통합하고 倭國과의 교통로를 열고 있으며, 369년, 371년 2차례에 걸친 對高句麗戰에서의 승리는 바로 그 업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국제무대로의 진출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근초고왕대의 대왜교섭과 관련되는 실물인 七支刀는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제작하여 倭王에게 하사한 것이다. 또한, 三國에 있어서의 紀年 표기방식에는 中國의 연호를 사용한 예는 없으며, 단지 간지로서 年을 紀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독자적인 고유 연호를 제정하여 紀年하였는데, 三國에서 독자연호 紀年을 사용한 예에는 모두가 太歲紀年法이 채택되고 있다. 금석문에 나타난 廣開土王代의 ‘永樂’과 眞興王代의 ‘太昌’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百濟에 있어서는 《日本書紀》에 「百濟本紀」를 인용하여 기술한 기사 중에 「太歲辛亥三月云云」하고 있어, 百濟에서도 太歲紀年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七支刀의 명문에 나타나는 연호 ‘泰和’는 다른 정복군주와 마찬가지로 근초고왕이 사용한 독자적인 연호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七支刀는 이제까지 다양한 해석방법이 제시되어 왔으나, 實用器는 아니며, 일곱 가지에서 울리는 強한 금속의 특이한 진동음으로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보는 呪具로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