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백제 건국 주도 세력의 정체성
2. 남천(南遷)과 정체성의 변화
1) 동명신앙의 쇠퇴
2) 천지신 신앙의 변화
3) 남부여로의 국호 개정
4) 불교의 수용
3. 무왕의 익산 경영과 정체성
맺음말
요약
백제의 한성시대는 동명신앙이 국가 정체성의 중심에 있었다. 동명을 시조로 하여 왕은 천손으로, 신민들은 천손의 신민으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보다 먼저 동명묘를 세워 양국 간 동명 계승자 경쟁 구도를 설정해 차후 치열한 경쟁을 예약하였다. 그러던 중 4세기 말 이후 같은 동명의 후예인 고구려의 줄기찬 침공은 동명신앙을 지속하는 데 난감한 국면을 조성했다. 고구려를 흥하게 해주는 동명을 피해자인 백제가 숭배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고, 완패에서 온 패배의식도 동명 숭배를 위축시켰다. 5세기에 들어 동명묘 배알 등은 점차 사라지고 남천 이후 그 신앙의 흔적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동명을 대신하여 고이왕 구이가 시조로 모셔지고, 종래의 천지신 숭배는 『주례』에 보이는 천 및 오제와 그리고 3산 5악의 산신에 대한 제사로 바뀌게 되었다. 불교도 적극 수용되면서 백제는 전륜성왕이 지배하고 사면불 등 각종 불상이 지켜주는 불국토가 되어가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중에도 부여계는 한성 수복의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남부여로 국호를 개정하고 수복전을 펼쳤지만 그것은 미련이었다.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계의 패권을 가르던 한성시대와 달리 신라와 더불어 변한 즉 가야를 두고 패권을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익산 경영은 수도 사비의 편재에 따른 제약에 대한 보완책이기도 하였으나, 마한적 전통과 힘을 의식한 결과로서 정체성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책이었다. 그런데 백제는 정체성의 괴리나 문제점을 충분히 지양하지 못한 채, 자체 모순과 지도자의 미숙함 그리고 국제적 대전환의 수레바퀴에 치여 나라를 잃고 말았다. 백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본 축인 부여와 마한이라는 두 개의 종족적 축은 그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국가체제를 약화시켜 국가 멸망 원인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은, 대치와 견제 상호작용 등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체계가 쉽게 유입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고 특정 사상의 독주를 막아주어,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다양한 사상의 공존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리하여 외래의 유교나 불교 그리고 여유와 분방함조차 가져온 도교와 신선사상 등이 종래의 사상체계와 혼융되어 시너지효과를 발하면서, 수준 높고 다양한 빛깔의 백제문화를 창조하여 한국문화의 한 저류를 구축해 주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