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장수군의 역사ㆍ지리적 배경
1. 장수의 자연 환경과 고고학적 흔적
2. 백제 시대의 교통로와 성암 마을 주변
Ⅲ. 번암면의 유래와 변화 과정
1. 번암면의 유래
2. 상.중.하번암방의 위치와 변화상
Ⅳ. 성암 마을의 등장과 변천
1. 성암 마을의 등장
2. 성암 마을의 형성 시기
Ⅴ. 맺음말
요약
기록상 성암마을이 나타나는 것은 『戶口總數』(1789)인데, 당시에는 장수가 아닌 남원 하번암방에 속한 마을로 ‘복성리’와 ‘주암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장수지역에 전하는 ‘복성과 변도탄’ 관련 전설에 의하면, 성암마을의 형성시기가 좀더 소급된다. 왜냐하면 전설에 등장하는 변도탄은 변사정이란 실존 인물로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2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제2차 진주성싸움(1593)에서는 在外運糧將이되어 곡식을 날랐다는 사실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邊士貞과 관련하여 星巖마을의 형성이 적어도 임진왜란 직후까지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시기 長水일대는 왜군의 침입에 따라 매우 혼란하고 무질서한 상황이었다. 宣祖30년(1597)기록에 의하면 적들이 장수 읍내뿐만 아니라 성암마을에서 가까운 ‘어깨내(肩川)’마을 즉 번암면 노단리 일대에서도 출몰하였다. 더군다나 그 적들 중에는 실제적인 왜군뿐만 아니라 조선인 폭도들도 있었다. 당시 행정 공백 상태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장수 및 인근 지역의 사람들은 좀 더 안전한 피난처를 찾게 하였다. 변도탄이 조성한 복성마을은 인근 거리에 있으면서도 인적이 뜸한 조건으로 해서 어느 정도 난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 역할이 가능하였던 것이 아닐까한다. 즉 성암마을은 국가 환란시 피난처의 역할이 수행되던 지역이었다가 이후 그곳에 눌러앉은 사람들이 서서히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이며, 실제 마을조사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동학농민혁명을 피해 마을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상통한다. ‘복성과 변도탄’ 전설을 좀 더 유효한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성암마을의 시작은 여러 정황이나 지형적 조건으로 볼 때 壬辰倭亂(1592∼51598)을 전후로 한 시기와 관련되며, 약200여년의 시간이 흐른 正祖代에 이르면 ‘복성리’와 함께 ‘주암리’까지도 하번암방의 엄연한 마을로써 기록에 남게 되었고, 日帝에 의해 論谷里로 통합되었다가 1980년 8대에 복성리의 ‘성’자와 주암리의 ‘암’자를 따서 星巖마을로 행정 명칭이 바뀌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