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高句麗의 犧牲儀禮
II. 百濟의 犧牲儀禮
III. 新羅의 犧牲儀禮
1. 7세기 이전 新羅의 犧牲儀禮
2. 7세기 이후 新羅 犧牲儀禮의 變化
맺음말
요약
‘犧牲’의 일반적인 정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단 구성원의 안녕을 기원하여 행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의의 범위를 좀 더 좁히면 ‘제사지낼 때 바치는 소나 말․양․돼지 따위의 짐승’으로 볼 수 있으며, 이렇게 바치는 짐승은 제사를 드리는 인간과 이를 받는 신 사이의 유대 관계를 확립해주는 신성한 효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다.
고구려의 희생의례 기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주요 희생은 돼지와 사슴이었으며, 1~3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대부분이 기사는 희생인 돼지를 쫓는 과정에서 생긴 일과 이와 관련된 정치적인 일들이다. 그리고 열전 온달전을 통해서 돼지와 함께 사슴이 주요 희생동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희생을 관리하는 관직인 ‘掌牲’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掌牲’이라는 관직은 고구려 초기국가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 영향력은 천도와 왕통을 잇는 것과 관련 있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희생의례는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는 비류왕시기 교제에 쓸 희생을 직접 희생을 베는 한 번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희생을 베는 전문 관직이 있었음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통해서 사슴사냥과 사슴진상의 기록이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많이 나타나고 있어 희생동물을 사슴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처음 나타나는 것은 6세기 건립된 금석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6세기 건립된 봉평비와 냉수리비를 통해서 소를 희생으로 삼는 희생의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나타나는 희생의례의 기록은 백마를 희생으로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7세기 이후 중국의 예제 수용 이후 중국적 예제 질서가 신라 사회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례』를 통해 은나라의 백마 희생을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