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불교 수용 배경과 그 과정
3. 불교와 왕권의 결합 방식, 그리고 국가불교
4. 사찰의 分化와 願塔 조성
5. 맺음말
요약
동아시아 세계에 전래된 불교는 역동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커다란 변화를 수반했다. 불교는 정복전의 승리라는 호족군주들의 현실적인 욕망과 불승들의 효과적인 불교 弘布를 위한 방편으로써 실권자와의 결탁이라는 방식으로 발화했다. 북중국과 남중국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에 각각 전래된 불교는 왕실의 관심과 환대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 요체는 불교가 국가의 세력 확장에 크게 도움이 되는 종교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세계의 불교는 모두 선선히 수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신라와 왜에서는 커다란 진통을 겪었다. 특히 왜에서의 불교 수용 여부는 권력 핵심 세력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 백제는 왜 조정의 費佛派를 제압하는데 무력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종교전쟁의 결과 백제의 지원을 받은 숭불파는 왜 조정의 실력자인 대연의 물부씨를 討滅했다. 이렇게 해서 왜 조정에서 불교의 정착이 가능했던 것이다.
불법의 흥륭은 최고 권력자의 비호를 받아야만 효과가 지대해진다. 즉 왕권과 불교의 결합은 결국 ‘王이 곧 부처이다’라는 왕즉불사상을 가져 왔다. 이러한 북방불교의 영향은 백제와 신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조 양무제처럼 국왕이 승려가 된 사례는 신라 진흥왕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불법과 왕법의 일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僧官制가 나타났다. 이는 황제권 밑에 불교를 두고, 그 조직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체제의 구축을 뜻한다. 이렇듯 승관제를 기반으로 한 불교는 국가불교이자 호국불교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속성은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왜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불교가 일반 사회 저변에 확대되는 과정에서 여성 전용 사찰인 尼寺의 조성이 나타났다. 이 경우는 중원대륙 뿐 아니라 삼국과 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官寺 뿐 아니라 개인의 사찰인 私寺가 가문의 願刹로서 조성되기도 했다. 무수한 寺塔의 건립 속에서 發願塔의 조성도 확인된다. 백제 왕흥사 목탑의 경우도 사찰의 伽藍規約과는 별개의 용도로 당초에는 조성되었다. 백제 도성의 모습을 일컬어 “절과 탑이 매우 많았다”고 한 기록은 국가적 에너지가 불교로 쏠리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제 불교는 유교와 도교가 混淆하는 특징을 지녔다. 일례로 백제금동대향로에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복합적인 세계가 재현되었다. 백제에는 외형상 道觀은 없지만 산수문전 등에서 보듯이 도교는 불교와 공존했다. 의자왕의 이름 유래를 불교나 유교 모두에서 찾듯이 양자가 엄존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불교가 지닌 세계성을 매개로 국제성이 강한 문화를 구축하였다. 아울러 백제는 동아시아 세계가 공유하는 불교 신앙을 통해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확대시켰다. 이 점이 백제 불교 문화의 특징이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