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에서 백제사연구가 하나의 시대사연구로서 부각하게 된 시기는 1970년대 초반 이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백제사연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제자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시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이때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백제사 사료들의 유기적인 연관성이나 문헌사와 고고학의 학제적 연결 등의 연구 방법론이 새롭게 모색되었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한편 이 연구는 한성시대 백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기존의 연구가 지니고 있던 한계를 극복해주었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사비시대의 연구가 부진했던 것은 한성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사료가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이한 현상이었다. 여기에서 사비시대의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정치적 변화과정 및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등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백제사에서 사비시대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올바르게 설정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전반적인 부분을 다룬 연구가 아니라, 사비시대에 대한 개별연구가 구체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1990년이 사비시대 백제사연구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시기인 것은 이때 사비시대만을 독자적으로 다룬 첫 박사학위논문이 나온 사실일 것이다. 이 연구 역시 정치사연구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조직이나 불교사, 외교사 등의 분야를 새롭게 다루었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사비시대의 연구에 백제사부흥운동 시기까지를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비시대 백제사 연구의 범위를 확대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10여 년 동안에 걸친 연구를 통해 사비시대의 백제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역시 무령왕릉의 발굴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는 부여 능산리 사원을 비롯하여 사비시대의 백제유적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성과가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연구주제를 보다 심화시켜나가는 한편, 매우 다양한 새로운 주제들이 계속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이에 역사용어의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나 금석문이나 목간과 같은 새로운 자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도성사부터 병제사나 과학기술사 및 생활사나 질병사 분야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혀질 수 있게 되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