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韓史와 百濟史 연구는 문헌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다. 『三國史記』 백제 관련 기사는 신라에 비하면 훨씬 疏略한 편이고, 『三國遺事』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제한되어 있다. 그리하여 『三國志』魏書 東夷傳을 비롯한 중국 역대 正史의 백제전이나 때로는 『日本書紀』한국 관계 기록을 참고하여 연구상의 공백을 극복해 가면서 가까스로 그 歷史像을 구축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간 마한․백제사 연구에서 견인차의 역할을 해 온 것은 실로 고고학과 미술사학의 두 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益山지역에 국한하여 그 주요한 성과를 열거해 본다면, 청동기시대 이래 마한․백제시대에 걸친 여러 시기의 고분 및 주거지에 대한 발굴 조사, 王宮里 5층 석탑에 대한 해체 수리작업, 1974~1975년 미륵사지 東塔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간에 걸쳐 진행된 同 寺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 조사, 그리고 1989년 이래 현재까지 장기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왕궁리 宮坪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 조사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 같은 발굴조사사업이 진전됨에 따라서 익산지역이 한국고대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조선 準王의 南遷은 남한지역이 장기간의 침묵을 깨고 바야흐로 정치적 사회로 돌입하게 되는 최초의 대사건이며, 이로써 마한사회는 그 성립의 端初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준왕이 정착한 곳은 현재의 익산지역으로 짐작된다. 뒤에 마한 북방에서 일어난 백제가 중국 군현을 상대로 한 교섭과 전쟁 경험을 통해서 力量을 축적한 뒤 지배 영역을 확대하게 됨에 따라 익산지역도 마침내 백제에 편입되고 말았다. 하지만 웅진․사비시대에 들어와 금강의 地政學的 중요성이 높아지고 호남평야에 대한 농경지 개척 사업이 강력하게 추진된 결과 익산지역의 비중은 더욱 커져서 백제의 別都와 같은 지위로 격상되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특히 武王 때 익산으로 천도하면서 지은 帝釋精舍가 639년의 재난 때 큰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된 『觀世音應驗記』 본편의 追記 내용은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체 수리 때 나온 유물에 의해서 일부 입증되고 있다. 한편 宮坪址 및 미륵사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 조사 결과 王都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차츰 高調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