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유물 속에서 人名으로는 ‘係文, 思利利, 多利, 巳達巳, 趙思, 䟽加鹵, 黑齒常之’ 등이 나타난다. ‘係文’은 日本書紀의 ‘宣文’, 三國史記의 ‘盖文, 陸貴文, 燕文’, ‘思利利, 多利’는 신찬성씨록의 ‘乃理, 努理’, ‘巳達巳, 趙思’는 三國史記의 ‘沙若思, 辰斯’, 日本書紀의 ‘意斯’, 三國遺事의 ‘文思’, 䟽加鹵‘는 三國史記의 ’解婁, 多婁, 己婁, 角蔞, 進奴, 毘奴, 眞老, 召西奴, 麻奈父奴‘, 日本書紀의 汶斯干奴’ 등이 끝이 비슷한 人名들이다. 특히 ‘ro/ru'계는 조재훈(1973:17)의 주장처럼 고구려의 인명에도 많이 보이는 것으로 북방계 이민족의 그것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人名의 끝부분이 비슷한 현상은 당시 유행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떤 신분상의 표시를 위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人名들이 문헌 또는 유물 속에 등장하는 人名임을 고려하면, 주로 지배계층의 이름에 붙여 신분상 표시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수희(1977:25-27)도 백제시대의 인명을 현존 문헌을 조사하여 180개를 찾은 후, 내와 史書에 등재된 인물은 대개 관료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서민의 성명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하고, 백제시대에도 서민층의 성이 존재하였던 것인지의 여부를 밝힐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물 속에 등장하는 인명 중에 ’係文, 多利, 思利利, 巳達巳‘ 등은 유물제작에 관여한 장인들의 이름이다.
백제 유물 80여 종을 대상으로 그 속에 표기된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기대하던 바와는 달리, 백제어의 많은 모습을 알 수 없었다. 80여 종이라 하지만, 많은 유물의 기록이 잘리거나 파손된 형태가 많고, 단순한 문장이나 구에 해당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한편 신라시대의 관직명이 몇 곳에서 등장하고 人名과 이두식 표기도 신라의 것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또 양직공도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구려어와 백제어도 유사했음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삼국시대의 언어 차이는 방언적 차이였다는 증거이다. 백제어와 관련된 문헌이나 유물들이 더더욱 발견되고 백제와 교류했던 당시의 중국과 일본문헌들, 과거 백제 지역의 방언 및 지명 탐색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에 따른 백제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