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유역의 청동유물․유적은 목지국으로 대표되는 한강 이남의 충청․전라권에 비해 결핍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 이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강력한 세력집단이 출현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은 온조로 대표되는 유이민집단의 정착을 용이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지배층을 구성하는 세력은 고구려계 유이민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온조와 비류로 대표되는 제집단들의 남하를 통한 백제국의 형성시점은 고구려의 정치적 변동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1세기 중엽 나부통치체제로의 통합과정을 밟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탈세력의 남하가 시조설화로 기록되었다고 보인다. 한강유역에 군 단위별로 분산된 적석묘의 분포나 시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부족 단위로 이동한 유이민들은 고구려계 철기문화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단조철기를 바탕으로 선주민세력의 읍락을 흡수․통합하면서 《삼국지》의 제소국에 비정되는 북부, 동부 등을 형성하였다. 또한 낙랑계 토기로 대표되는 한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소국을 더욱 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존의 한강이남, 즉 주조철기 문화를 중심으로 충청․전라도에 형성되어 있던 마한과는 또 다른 세력권의 형성이라 볼 수 있다. 백제국의 세력권이 한강유역 일대로 확대되어가는 것은 《삼국지》의 대방군 설치 기사를 통해 볼 때 2세기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백제국을 중심으로 여러 정치체들이 통합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백제국은 중부지역의 목지국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