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한 병탄시기와 마한의 세력범위를 살펴보았다. 먼저 백제의 마한 병탄시기를 세 측면에서 추적하였다. 첫째, 『晋書』東夷列傳에 나오는 馬韓이 277년부터 290년까지 8차례에 걸쳐 晋왕조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 사실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서 마한이 3세기 말까지 존속했다는 점과 290년 이후의 가까운 시점에 멸망했으리라는 점을 제기하였다. 둘째, 『三國史記』 溫祚紀에 나오는 마한 병탄기사의 실제적 반영 시점을 責稽王代(286~297)로 보았다. 책계왕대는 290년에서 가장 가까운 시점일 뿐만 아니라, 실제 『三國史記』責稽紀 기사를 형식적․내용적 측면에서 분석해본 결과 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290년 직후의 시점에 백제가 마한을 병탄할 수 있게 된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고에서는 그 가장 가까운 원인으로서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주목하였다. 즉, 백제는 3세기 후반의 고이왕대와 책계왕 초반에 중국 군현에 대하여 실리외교를 전개해 갔던데 반해, 마한은 비타협적인 강경노선을 견지하여 중국 군현과의 무리한 전쟁으로 일관해서 일대 타격을 자초함으로써, 3세기 후반부터 백제와 마한 간의 역관계는 역전되고 더욱 심화되어 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마한은 백제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277년부터 중국 군현에 대한 지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진 왕조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군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중국 군현의 전제를 완화시키고 마한을 전격적으로 병탄했던 것으로 보았다. 이에 허를 찔린 중국 군현은 견제를 완화시키고 마한을 전격적으로 병탄했던 것으로 보았다. 이에 허를 찔린 중국 군현은 백제에 대해 강경책을 쓰게 되어 무력 공격을 감행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음에 백제의 병탄대상이 된 마한의 세력범위를 살펴보았다. 溫祚紀의 마한 병탄기사에 나오는 마한의 國邑과 백제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했다는 圓山城과 錦峴城, 그리고 마한을 병탄한 이후에 백제가 옛 마한의 요지에 축조했다는 湯井城과 大豆山城 등의 위치 비정을 통해서 마한의 대체적인 세력범위를 추정해 보았다. 그 결과 마한의 세력범위는 천안․직산 일대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 아산만, 동남쪽으로는 소백산맥 연변, 북으로 안성천, 그리고 남으로 금강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