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한국 고대의 여러 가지 척도 단위와 이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仞, 尋, 常 등의 중국 고대의 척도 명칭이 문무와 이전까지 신라에서 사용되었으며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쓰였는지 또 어떤 시기에 한반도에 유입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무왕 전후 시기에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장, 보 등으로 대치되고 그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기에 장육존상에서 보둣 그 영향은 남았다고 생각된다. 심은 8척, 상은 16척에 해당하는 척도명이다.
丈의 길이는 10척으로 步, 里 보다는 그 사용범위가 좁고 일반적으로 물건의 높이나 길이, 간격을 나타내는데 통용되었다.
보와 리는 가장 일반적인 척도단위로 성이나 일정 지역의 둘레를 나타내는데는 보와 척으로 표시하지만 정확한 거리나 길이에는 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포백의 길이를 나타내는 匹과 疋은 통용되었으며 길이는 문무와 이전 심을 단위로 10심 즉 80척이었으며 이후는 7보 즉 42척이었다.
端은 원래 匹의 절반을 표시하는 것으로 20척이었으나 문무왕 이후 21척으로 쓰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척보다 짧은 거리는 寸과 分이 사용되었으며 그 이하 단위는 보이지 않는다. 10분이 1촌, 10촌이 1척으로 지금과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漢尺이 사용되었고 약22~23cm로 생각된다. 이는 신라나 백제에서도 사람의 키를 재는 척도로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백제는 약 35cm에 가까운 東魏尺을 사용했고 백제 기술자에 의해 건조된 신라 황룡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신라도 일부 사용되었다. 이는 일본어 高平尺으로 전파되어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라는 30cm의 唐尺이 사용되었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高平초기의 청주지방에서 사용된 당척을 볼 때 신라 당척이 그대로 고려에 계승된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