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 리 말
Ⅱ. 철제 보습 자료
Ⅲ. 三國時代犁의 특징
Ⅳ. 犁耕의 실시와 전개과정
Ⅴ. 맺 음 말
요약
삼국시대 犁의 형태를 추정하기 위해 고고학상 지금까지 알려진 보습 자료를 정리한 결과 평면 형태상 이등변 삼각형과 등근 U자형으로 대별되며, 銎部는 橫斷面V자형이 많고 세모꼴 주머니형도 있다. 보습 형태는 기후·토양 등 지역적 특성과 유관하며 끝이 예리한 평면 삼각형은 주로 중부 이북 지역 즉 田作중심지에 분포하고 水田경작이 병행되는 신라·가야지역에서는 U자형이 선호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토대로 삼국시대 犁의 형태를 추정해 본다면 삼국시대 犁는 中小形의 가벼운 것으로 기경 작업에는 주로 無床犁가 사용되었다. 無床犁가 삼국시대 起耕用犁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주요 起耕具인 따비사용 전통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것은 경작지와 경작방식의 특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播種用有床犁의 존재가 확인되어 이미 작업 내용에 따라 형태와 기능이 다른 犁가 선택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牛耕을 저 시작한 고구려는 後漢代에 이미 중국을 통해 각종 보습날을 들여왔고 늦어도 4세기경에는 고구려의 지형과 토양에 맞는 고구려식 보습을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야 지역은 積石木槨墳초기단계의 경주지역에서는 아직 牛耕실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6세기 石室墳축조단계에 이르면 신라의 변경지역에까지 지역화된 신라식 보습이 분포될 정도로 牛耕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인다. 백제의 牛耕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나 신라, 고구려의 경우에 비추어 牛耕이라는 획기적인 농경기술의 확산은 三國이 집권적인 貴族國家로써 체제정비를 해나는 과정에서 가속화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로서는 牛耕개시에 대한 좀 더 정확한 내용을 밝히기에는 자료가 크게 부족하다. 한국 古代犁에 있어서 언제부터 코뚜레와 고삐 등 소를 제어하는 발달된 장치를 사용하여 앞에서 소 모는 사람없이 단독으로 쟁기질을 하였는지, 소 두 마리가 끄는 것이 보편적이었는지 아니면 한 마리 소가 끄는 犁가 더 일반적이었는지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삼국시대 犁의 성능이 어느 정도의 深耕을 행할 수 있었는지 또는 碎土와 翻土의 효율은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牛耕전개과정에서 볏달린 犁가 언제부터 어떤 형태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은 비단 古代뿐 아니라 이후 시기의 한국농업기술사의 체계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