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 문제의 소재
II. 마한병합과 지역성의 잔존현
III. 군정적 지방지배에 의한 사회통합의 한계
IV. '솔선'관적 관등명칭에서 볼 수 있는 마한시대 유제의 활용
V. 맺는말
요약
百濟史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通說에 대해 재검토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즉 종래 백제국가의 토착적 기반이 미약했던 점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면서 국가권력과 在地세력 간의 乖離현상이라는 것이 백제사의 현저한 특징인양 지적되었으나, 최근 熊津遷都 이후 백제조정인 檐魯制라든가 혹은 方․郡․城體制 등 지방통제책을 채택하면서 끈질기게 추구한 在地세력 통합을 위한 노력에 새삼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6세기에 들어와 5方制를 채택하기 훨씬 이전부터 백제조정과 연맹관계를 맺고 있던 지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른바 4部체제가 시행되었으며, 이는 그 자체 族制的인 성격이 강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본고는 이 같은 학계의 최근 동향에 留念하면서 백제조정이 强固한 地域共同體세력을 지배체제 속에 편제하기 위해 시도한 몇 가지 方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率字 계열의 관등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조정은 ‘周禮’的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馬韓 시대의 遺制랄까 전통이랄까를 살려서 지역세력을 흡수․통합하려는 묘책을 강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사비시대에 들어와 백제 조정은 국호를 南扶餘로 고쳐 지배자집단의 민족의식에 호소한 바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한 先主族과 관련이 깊은 명칭으로 짐작되는 準을 표방하기도 했다. 이는 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마한토착세력의 진정한 복종과 협력을 받아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고 짐작된다. 儒敎思想에 입각하여 純然히 漢式 명칭의 官府․官職을 재정하고 나아가 中國的인 祭祀儀禮까지 도입 수용한 백제조정으로서는 마땅히 馬韓시대의 殘率을 청산하는 방향으로 나갔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官等체계에 일부 前代의 ‘率善’官的 명칭을 想起시키는 率字 관등을 포함한 것은 확실히 異例的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점 백제조정은 지역세력의 흡수 통합이라는 至上 課題에 적극 대처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